洪 範 圖
홍범도자료실
영상자료
총 95건
영상한국사 I 49 홍범도, 독립운동으로 가족을 모두 잃은 후에도 투쟁을 계속하다
- 홍범도를 잡으려 혈안이 된 일본군은 무기를 회수하고, 가족을 볼모로 회유하는 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홍범도는 가족들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도 의병 전쟁을 계속했다. 일본군에게 붙잡힌 홍범도의 부인 이옥녀는 모진 고문을 받던 중 옥사한다. 큰아들 양순은 전사하고, 작은아들 용환은 고문을 당한 뒤 결핵에 걸려 병사하는 등 홍범도의 가족은 모두 독립운동으로 생을 마감한다. 홍범도는 가족을 모두 잃은 후에도 의병투쟁을 계속했다. 홍범도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권업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1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과 손잡은 러시아의 핍박을 피해 연해주를 떠난다.
영상한국사 I 226 일본 패전 후 살해된 ‘위안부’들과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
-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면서 일본은 결국 항복을 선언한다. 일본의 패망 소식이 알려지자 위안소 관리자들은 ‘위안부’들에게 약속한 돈도 지급하지 않은 채 종적을 감춘다. 퇴각하는 군인들에게 ‘위안부’의 존재는 또 다른 골칫거리였다. 군사기밀이 노출될 것을 우려해 ‘위안부’들을 집단 사살한 경우도 있었다. 중국 운남성 등월방공호에서 집단 사살된 ‘위안부’들 가운데 7명이 조선인 ‘위안부’로 밝혀졌다. ‘위안부’ 생활을 한 몸으로는 차마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살한 ‘위안부’들도 있었다. 일본 정부는 일관되게 ‘위안부’ 문제에 군과 정부가 개입한 사실을 부인하고, 민간업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위안소를 설치하고 ‘위안부’를 모집, 운영했다는 주장한다. 그러나 요시아키 교수는 ‘위안부’ 문제에 군이 직접적으로 개입했음을 증명하는 증거들을 찾아냈다. 일본군의 공식 기밀 서류인 『진중일지』를 통해 위안소의 설치에 군이 직접 개입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군 ‘위안부’ 집단사살 #요시아키 #교수 #진중일지 #위안소설치 #일본군직접개입
영상한국사 I 225 일본 ‘위안부’ 모집의 실상과 위안소 운영 방법
- 일본은 많은 군 위안부를 모으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그중 하나가 근로정신대로, 공장에 취업을 시켜준다는 명목으로 여성들을 모집했다. 인신매매, 납치까지 감행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군의 전선은 확대일로를 걷는다. 1941년에는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시작됐다. 이후 1942년 1월에 필리핀 마닐라 함락, 2월에 싱가포르 함락, 3월에 인도네시아를 점령하면서 일본의 전선은 미얀마까지 확대됐다. 이 무렵 일본의 위안소 건립은 훨씬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점령한 지역에 가장 먼저 위안소를 세우고 군대를 배치했다. 거의 모든 전선에 위안소가 존재했다. 겨우 몸 하나 누울만한 좁은 공간에서, ‘위안부’들은 하루 종일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영상한국사 I 224 일본 정치인과 우익단체의 위안부 관련 망언
- 하시모토 토오루 오사카 시장은 일본군에게 휴식과도 같은 위안부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런 망언은 일본 국내는 물로 국제사회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일본 인권단체들은 하시모토 시장의 망언을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우익단체들은 하시모토 토오루 시장의 망언을 옹호하는 집회를 열어, 한국 ‘위안부’를 고급매춘부라 비하하고, ‘위안부’ 강제연행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일본정부도 여성을 납치해 ‘위안부’로 이용했다는 사실은 증거로 입증된 바가 없다고 했다. 전쟁 중이었다고 하더라도, 20만 명이 되는 부녀자가 강제 연행됐는데 한국 정부가 가만히 있었을 리 없다는 것이다. 논란의 중심에 선 하시모토 오사카 시장은 기존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하시모토 #오사카시장#위안부_관련_망언
영상한국사 I 223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 아시아 전역에서 위안소를 운영하다
- 1941년 말, 일본은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일대를 점령한다. 일본군이 주둔하는 곳마다 위안소가 설치됐다. 대만 동부 화련 지역의 소수민족 여성도 위안부로 끌려갔다. 진주만 공습을 받은 미군은 일본군 남태평양 사령부가 있던 팔라우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낙원으로 불리는 팔라우섬 곳곳에는 일본과 미국의 치열한 전투의 흔적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망망대해 록아일랜드에도 일본군 위안소가 있었다. 본섬에서 한 시간이나 떨어진 이곳의 ‘위안부’들은 모두 한국인들이었다. 60여 명의 여성들은 몇 개월 동안 갇힌 채, 성노예 생활을 해야만 했다. 미군의 공세에 밀린 일본군은 굴을 파고 숨어들었다. 일본을 거쳐 팔라우로 끌려간 강우자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인 ‘위안부’들은 굴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아야 했다. #일본군 #위안부#태평양전쟁#록아일랜드#팔라우 #강우자할머니
영상한국사 I 222 일본의 중국 침략과 ‘위안부’ 학대
- 일본군은 여성들을 주둔지마다 끌고 다니며 ‘위안부’로 삼았다. 철로가 없어 여성들을 데리고 가지 못하면, 현지 부녀자들을 납치하기도 했다. 잡아온 부녀자를 장기간 강간하다 죽으면 또 다른 부녀자들을 끌고 왔다. 한 일본군은 회고록에 허난성에서만 이렇게 죽은 ‘위안부’가 10만 명은 될 것이라고 썼다. 일본군 위안부제도는 1930년대 초, 일본이 아시아 패권을 쥐기 위해 대륙침략을 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중국 상하이에는 최초의 일본군 위안소가 남아있다. 1930년대 초기 위안소는 군부대 안에 설치돼 일본군이 직접 운영하고 관리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일본군 수가 늘어나자 위안소 수도 늘어났다. 당시 난징에는 대규모 일본군이 주둔해있었고, 시내 한복판에는 아시아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난징위안소가 자리했다. 일본군은 민간업자에게 위안소 운영을 맡겼다. ‘위안부’들은 하루에 십여 명, 심지어 몇십 명까지 상대하며 동물과도 같은 취급을 받았다. 말을 듣지 않으면 곧바로 가혹행위가 이어졌다. 잔혹한 위안소 제도는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지속됐다. #일본군 #위안부#중일전쟁#난징위안소#성노예
영상한국사 I 221 배상도 받지 못한 일본 근로정신대 피해자들
-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끌려간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을 일본 정부는 여전히 외면하고 있다. 일제는 공부를 시켜준다고 속여 이들을 데려간 후 가혹한 노동의 대가로 99엔을 줬다. 일본 정부가 우리 정부에게 건넨 10만여 명의 노무자 명단에는 근로정신대 556명이 포함돼 있다. 그들이 수십 년 전 받지 못한 임금은 20억이 넘는다.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일본 #근로정신대 #피해자#임금체불
영상한국사 I 220 오키나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 1975년, 최초로 자신이 위안부라는 사실을 밝힌 배봉기 할머니는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일본군 수송선을 탔다. 하지만 도착한 곳은 위안소였다. 할머니는 6명과 함께 낮에는 일본군을 위해 밥과 빨래를 하고, 밤에는 위안부로 하루에도 수십 명씩 일본군을 상대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려야 했다. 오키나와에는 한때 섬 하나에 20개 가까운 위안소가 있었고, 조선인 ‘위안부’가 천 명 이상 있었다. 하지만 미군이 작성한 귀환자 명단에 조선인 여성은 147명뿐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의 행방은 여전히 알 길이 없다. #일본군_위안부_피해자#배봉기_할머니#오키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