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 範 圖
홍범도자료실
영상자료
총 95건
영상한국사 I 140 머슴출신 산포수 의병장 홍범도의 봉기
- 홍범도는 1868년 8월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5살에 고아가 돼 머슴살이를 한 그는 결혼 후에는 함경도 북청에서 산포수로 생활했다. 홍범도는 리더십을 갖춘 명포수였다. 그는 포계(산포수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만든 조직)의 대장으로 추대됐고, 동료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힘썼다. 1895년 명성왕후 시해 이후, 홍범도는 꾸준히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당시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 등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활발히 일어나던 때였다. 홍범도가 이끄는 함경도 의병부대는 연전연승했다. 지형에 익숙하고 뛰어난 기동력을 가져 유격전을 전개하는 데 유리했다. 홍범도는 말단 병사까지 세심하게 챙기는 대장이었다. 사령관의 군복과 말단 병사의 군복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날으는 장군, 비장군 등으로 불린 그의 명성은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에서 자자했다. 홍범도를 찬양하고 응원하는 '나는 홍범도'라는 노래도 있었다.
영상한국사 I 139 홍범도 장군의 산포수부대와 봉오동전투
- 일본이 조선인의 총기 사용을 금지하자 산포수들은 본격적으로 항일투쟁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홍범도는 산포수 항일투쟁 세력의 구심점이었다. 1919년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은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혜산진의 일본군 수비대를 섬멸한 데 이어 갑산과 자성의 일본군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둔다. 3.1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평화적인 시위가 아닌 산포수를 주축으로 한 무력항쟁이 한반도 북쪽에서 펼쳐진 것이다. 홍범도 장군의 무장투쟁이 전개되자 일본군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집결한다. 봉오동전투의 막이 오른 것이다. 일본군은 독립군을 추격해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진공했다. 홍범도 장군의 독립군은 일본군과의 결전을 위해 봉오동으로 집결했다. 1920년 6월, 홍범도 장군의 대한북로독군부는 봉오동의 깊은 산속으로 적을 유인하는 작전을 펼쳤다. 독립군의 매복사실을 모른 채 접근한 일본군 19사단은 대한북로독군부의 집중공격을 받고 궤멸한다. 『독립신문』은 봉오동 승첩을 대대적으로 소개했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들은 일본군의 진로를 정확히 예측하고 유인작전을 펼쳤다. 산포수 출신인 홍범도 장군이 맹수와의 싸움에서 터득한 유인술과 매복술에 일본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영상한국사 I 138 봉오동전투 승리, 민중들에게 희망을 주다
- 1920년 6월 4일 새벽, 독립군이 함경북도 강양동의 일제초소를 급습한다. 두 갈래로 나뉜 추격대가 후안산을 통해 봉오동으로 진격해, 일본의 토벌대들과 다시 접전을 벌였다. 이미 삼둔자에서 독립군의 대대적인 기습을 받은 일본군은 참패를 설욕하기 위해 250여 명의 월강추격대 병력을 편성해 반격에 나선 상황이었다. 독립군은 봉오동 골짜기에 치밀한 포위망을 펴놓고 일본군을 기다렸다. 일본군이 봉오동을 향해 들어오자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 연합부대들이 일제히 집중 사격을 퍼부었다. 봉오동전투는 독립전쟁 역사상 첫 승리였고 그 중심에는 홍범도가 있었다. 이 승리로 홍범도는 민중들에게 독립의 기대와 희망을 심어주었다. 봉오동전투의 적군 사망자는 157명, 우리 측 사망자는 4명이었다. 일본이 작성한 봉오동전투 상보에도 우리 독립군이 잘 훈련돼있고, 지형을 이용한 방어가 상당히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밝혔다.
영상한국사 I 137 독립군의 첫 대승 ‘봉오동전투’
- 3.1운동 이후, 두만강변 국경지역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의 국경수비대는 만주에서 활동하는 무장독립군의 주요 표적이었다. 1920년 6월 4일 새벽, 두만강을 건넌 독립군들은 함경북도 강양동 일제 헌병순찰대를 격파하고 돌아왔다. 대대적인 기습을 받은 일제는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250여 명의 월강추격대 병력을 편성해 반격에 나섰다. 당시 북만주에서 활동하던 홍범도, 안무, 최진동이 이끄는 대한북로독군부는 연합작전을 펼치며 일본군을 유인해 몰살시켰다. 첫 무장독립투쟁을 실천에 옮긴 봉오동전투다. 독립군 연합부대에 대패한 일본군 지휘관 야스카와 지로 소좌는 만주벌 독립전사들의 활약상을 전투보고서에 남겼다. 독립신문은 봉오동 전투의 첫 승전보를 타전했다. 적군 사망자 157명, 부상자 300여 명의 대승이었다.
역사가 술술 - 날아다니는 장군 홍범도_#001
- 역사가 술술 - 날아다니는 장군 홍범도_#001
독립군 영웅 홍범도는 왜 극장 수위로 생을 마감했나? [심용환의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 CBS노컷뉴스와 '역사N교육연구소' 심용환 소장이 함께하는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가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 장군의 파란만장한 삶을 살펴봤습니다. 1920년 6월 7일에 일어난 봉오동 전투는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과 일본군이 벌인 최초의 대규모 전투로 당시 무장 독립운동의 붐을 일으켰던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전투를 지휘한 홍범도 장군은 중일전쟁 발발 이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어 1943년 10월 '고려인' 극장 수위로 쓸슬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스탈린은 홍범도 장군 등 연해주 지역 조선인들을 왜 강제 이주시켰을까요? 그리고 당시 강제 이주당했던 조선인들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 고려인이 되었을까요? 올해로 고려인 강제 이주가 80주년을 맞았지만, 일제 치하 민족의 시련과 고통을 온몸으로 겪어낸 고려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과 이해는 여전히 부족하기만 합니다.
나의 독립 영웅 I 24 독립영웅 이씨부인 (배우 최불암)
- 홍범도는 조선말기의 의병장. 한일 합병이후에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이끔. 아내 이씨부인은 일본 순사대장에게 인질로 붙잡혀 남편 앞으로 투항을 권하는 편지를 쓰라고 협박당했음. 하지만 끝내 편지를 쓰지 않고 고문을 당하다 옥에서 세상을 떠남.
[홍범도 장군] 봉오동 전투의 영웅 <역덕이슈 오늘>
- 역덕이슈 오늘, 봉오동 전투! 1920년 6월 7일, 홍범도 장군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다! 독립운동사에서 빛나는 승리로 기억되는 두 전투가 있습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입니다.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 장군, 청산리 대첩은 김좌진 장군으로 기억됩니다. 홍범도 장군에 대해서는 이름 외에 아는 것이 많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포수였던 홍범도는 동료 포수들을 규합,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거합니다. 1907년 고종 퇴위와 군대 해산으로 정미의병이 일어나고,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해 포수들의 무기를 압수하려고 하자, 홍범도는 동료 산포수들을 모아 다시 궐기했습니다. 1908년 일제의 토벌을 피해 연해주 지역으로 망명한 홍범도, 그는 1919년 대한독립군을 창설해 국내진공작전을 펼쳤고, 압록강 연안의 혜산진을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간도와 연해주에서의 무장항쟁이 거세지자 일본군은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공격합니다. 1920년 6월 7일,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일본군을 길림성 왕창현의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해 공격합니다. 독립군 연합부대의 대승이었습니다. 홍범도와 대한독립군은 이후 청산리 전투에도 참가해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청산리 대첩 후 거세지는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홍범도와 독립군은 소련 자유시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1921년 6월, 항일무장투쟁 역사상 최악의 비극으로 불리는 자유시 참변을 겪습니다. 이 사건으로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군들은 뿔뿔이 흩어지거나 무장 해제를 당합니다. 홍범도는 소련에 남아 한인들의 권익옹호, 민족의식 고취에 매진했습니다. 나이 70세인 1937년, 홍범도는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합니다. 한반도와 만주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던 독립운동의 영웅 홍범도 장군은 카자흐스탄의 고려극장에서 창고지기를 하며 여생을 마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