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 範 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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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95건
영상한국사 I 211 홍범도 등 고려인들,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하다
- 러시아에 머물며 끝까지 독립투쟁을 모색하던 홍범도는 다른 동포들과 함께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다. 영하 30도에 육박하는 겨울, 난방시설 하나 없는 기차 짐칸에 실려가야했던 고려인들은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었다. 그나마 도착한 사람들도 맨손으로 황무지를 개간해 살아야만 했다. 강제이주 당시 홍범도의 나이는 70세였다. 홍범도는 카자흐스탄 알마티 고려극장 수위로 근무했다. 당시 고려인 극작가 태장춘은 홍범도의 생애를 무대에 올리고 싶어했고, 태장춘의 권유로 홍범도가 작성한 메모가 홍범도 일지다. 1942년 중앙아시아 크즐오르다에서 연극 ‘홍범도’가 공연됐다. 이듬해인 1943년, 홍범도는 해방을 2년 앞두고 눈을 감았다. #스탈린의한인강제이주정책 #고려극장 #홍범도일지 #극작가 #태장춘
영상한국사 I 209 여운형, 통일정부를 꿈꾸다
- 여운형은 1918년,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결성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에는 조선 독립을 알리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했고, 상해임시정부 초대내각에 외무부 차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19년 11월, 여운형은 일본 내각의 초청을 받는다. 수백 명의 일본기자들을 상대로 한 연설에서 그는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고 일본 정부를 비판한다. 여운형을 회유하려 한 일본 내각은 역풍을 맞아 중의원 해산 사태에 놓인다. 1929년, 여운형은 일제 경찰에 체포돼 3년간 수감된다. 출옥 후, 조선중앙일보 사장이 된 그는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이 우승하자 일장기 삭제 사진을 게재했다. 1944년 8월, 여운형은 좌우를 망라한 애국세력을 모아 건국동맹을 결성한다. 이는 해방 후 출범 이틀 만에 체계를 갖춘 건국준비위원회의 밑바탕이 된다. 그러나 통일정부 수립의 길은 쉽지 않았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 안으로 좌우대립이 극렬해졌다. 통일임시정부 구성을 논의하려던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됐다. 1946년 6월, 이승만은 정읍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제안하고, 여운형은 이를 반대한다.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을 추진한 여운형에게 양 진영의 비난과 공세가 쏟아지고, 그를 향한 끊임없는 테러가 발생한다. 결국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암살당한다. 그의 죽음으로 통일정부 수립의 꿈이 멈춰버린다. #몽양 #여운형#조선건국동맹#조선건국준비위원회#좌우합작추진#여운형 #암살
영상한국사 I 208 여운형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결성
- 1945년 8월 15일, 필동 한국의집에서 여운형과 정무총감 엔도가 만났다. 치안유지권을 넘길 테니 신변보호를 해달라는 총독부의 요청이었다. 조선의 정치범을 즉각 석방하고, 치안유지와 청년조직의 건설에 간섭하지 말 것을 조건으로 여운형은 이를 승낙한다. 그리고 이튿날, 여운형은 방송과 전단을 통해 완전한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구심점으로 건국준비위원회 결성을 선포한다. 해방의 감격과 환희 속에 건국준비위원회는 보름 만에 145개 지부를 설치한 전국조직으로 확대된다. 석방된 독립투사들이 주축이 된 치안대의 치안유지활동 역시 자리를 잡는다. 해방 직후에 주요시설의 파괴와 약탈을 감시하는 것도 치안대의 몫이었다. 나아가 치안대는 일제경찰을 몰아내며 일제 잔재의 청산작업을 진행했다. #몽양 #여운형#건국준비위원회#독립국가 #건설
영상한국사 I 207 여운형, 농민동맹과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다
-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1943년부터 23만여 명의 조선청년이 일제의 총알받이가 되고, 200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이 강제징용 됐다.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전향이 이어진 1940년대. 일제는 여운형을 초청해 중국과 화해를 위해 힘써달라고 요청했고, 여운형은 이를 거부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참전 등으로 악화일로를 겪는 일제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게 된 여운형은 일제 패망에 대한 확신을 얻는다. 1944년 10월, 용문산에서 13명의 청년이 여운형과 만난다. 경기북부지역을 대표한 청년들이 비밀결사단체 농민동맹을 결성한 것이다. 당시 농민동맹원들은 용문산을 거점으로 징병을 피해 도피한 청년들을 보호하고, 일제의 공출로 인한 농민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비슷한 시기인 1944년 8월, 민족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까지 좌우를 망라한 애국세력들이 뭉친 조선건국동맹이 결성됐다. 해방 이틀 만에 위용을 갖춘 건국준비위원회 뒤에는 이들의 준비가 있었다. ※ 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 : 1945년 8·15광복 후 여운형(呂運亨)이 중심이 돼 조직한 최초의 건국준비단체. 약칭하여 건준(建準)이라고도 한다. #몽양 #여운형#비밀결사단체 #농민동맹 #결성#조선건국동맹#건국준비위원회
영상한국사 I 206 조소앙의 삼균주의, 통일정부의 지도이념이 되다
- 1935년, 조소앙이 속해있던 한국독립당을 비롯한 5개의 독립운동단체는 민족단일당으로서의 민족혁명당을 조직한다. 그러나 민족혁명당을 통한 독립운동세력의 결집은 곧 깨지고 만다. 제각기 독자적인 이념과 노선을 정립해가고 있던 세력들이라 단일한 주의를 지도이념으로 하는 통일당의 구성은 힘든 과제였다. 그때 조소앙은 독립운동 진영의 이념적 대립을 극복하고, 좌익과 우익의 연합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제3의 지도이념을 제시한다. 정치, 경제, 교육 세 분야에서 골고루 평등이 실현되는 조선식 민주주의를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지도이념은 1941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에서 구체화된다. 조소앙은 민족의 독립과 이상사회 건설이라는 목표를 네 개의 단계론적인 방법을 통해 실현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국가와 국가,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사이에 차별 없는 평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좌우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제3의 노선인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좌우를 통합한 통일정부의 지도이념으로 채택된다.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운동세력의 힘을 통일한 가운데 해방 조국으로 돌아온다.
영상한국사 I 205 삼균주의에 기반한 조소앙의 항일투쟁
- 조소앙은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913년, 베이징을 거쳐 상하이로 망명한다. 1919년 2월, 김좌진과 함께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해 2인자에 해당하는 부령으로 활동한다. 대한독립의군부는 독립외교와 함께 일본을 상대로 한 무장독립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소앙이 목숨을 건 의혈투쟁을 주장한 데는 일제의 강점에도 불구하고 침묵하는 국내 사정에 대한 실망감도 들어있었다.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의 단결과 저력에 대한 자신의 회의가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3.1독립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조직하는데 참여한다. 1919년 4월에 선포된 임시정부의 헌법인 대한민국임시헌장에서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조금씩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정치적으로는 민주공화제를, 사회경제적으로는 평등사회를 지향함을 명시한 임시헌장은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사용한 첫 번째 정식 문서이기도 하다.
영상한국사 I 204 조소앙의 삼균주의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국강령
- 조소앙은 대한청년들이 만들어야 할 조국의 미래를 위해 ‘삼균주의’를 제시했다. 정치와 경제, 교육의 균등을 통해, 조국의 독립과 새로운 국가건설을 목표로 하는 삼균주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이념에도 뚜렷이 남아있다. 민족 국가의 큰 틀을 밝힌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 속에 녹아있는 삼균주의 정신은 좌우로 나뉘어 대립하던 독립운동 진영을 하나로 모은다. 조소앙은 식민지에서 분단으로 이어지던 시기, 좌우를 넘어선 제 3의 이념을 통해,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이루려했던 사상가였다. #조소앙의삼균주의#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
영상한국사 I 195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 김원봉의 임시정부 참여
- 조선의용대 주력이 화베이로 떠난 후에도 김원봉은 본부 대원들과 함께 국민당정부가 있는 충칭에 남아 있었다. 당시 충칭의 상황은 김원봉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충칭에는 1940년 9월, 임시정부가 창설한 광복군 총사령부가 있었다. 김원봉을 후원했던 국민당정부의 관심과 지원은 서서히 임시정부와 광복군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광복군 창설을 계기로 중국정부는 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통합을 종용해왔다. 화베이로 간 조선의용대가 공산당 부대인 팔로군에 합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임시정부는 조선의용대에 광복군 편입을 재촉했다. 공산당과 대치하고 있던 국민당 역시 김원봉을 점점 불신하기 시작했다. 공산당측도 필요에 따라 국민당, 공산당 양측과 모두 연대해왔던 김원봉의 행적 때문에 그를 깊이 신뢰하지 않는 눈치였다. 결국 충칭의 조선의용대는 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되고 김원봉은 부사령에 임명됐다. 중국 국민정부가 인정한 최초의 한국인 부대였던 조선의용대의 수장으로 자신이 만든 군대를 이끌고 조국의 독립을 이루겠다던 김원봉의 꿈은 그렇게 미완으로 끝났다. 1942년 10월, 임시정부에 정식으로 참여한 김원봉은 경상대표의원직과 군무부장을 맡고, 임시정부 개혁과 독립운동에 다시 한 번 박차를 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