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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자료
총 95건
영상한국사 I 219 사할린에서 귀국하지 못한 일본의 이중징용 피해자들
- 정태식 옹은 강제 징용된 아버지를 따라 사할린으로 건너왔다. 그는 아버지가 사할린으로 징용되면서 고향을 떠나야 했고, 1944년 아버지와 형이 사할린에서 일본 탄광으로 이중 징용을 당하면서 다시 생이별의 고통을 맛봐야 했다. 미군의 공격으로 석탄 수송로가 막히자, 일본은 본토에서 석탄 생산량을 늘리기로 결정하고, 조선 징용자들을 후방산업전사로 추켜세우며 일본 본토로 보냈던 것이다. 사할린의 탄광 중 규모가 큰 곳에만 필수 인력을 남기고 나머지는 폐쇄시켰다. 일왕의 신민이라던 한인들은 버려졌다. 해방이 된 후 당시 사할린 강제징용자 4만여 명은 코르사코프항에서 기다렸지만 끝내 고국행 배는 오지 않았다. 1970년대, 다시 귀환 움직임이 일어났다. 일본은 사할린 한인 문제로 비난에 직면하자 대한민국 귀환을 제의했다. 하지만 북한을 의식한 소련이 귀국을 막아 사할린 동포들의 귀국은 또 무산되고 말았다. #일제#강제징용#사할린 #강제징용_한인
영상한국사 I 218 히로시마 원폭 투하와 한국인 피해자들
- 1945년 8월 6일, 미군이 일본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히로시마 인구 34만 명 가운데 14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 야구계의 전설 장훈 선수의 큰 누이도 전신에 화상을 입고 고통 속에서 숨졌다. 장훈은 어머니 덕분에 원폭에서는 살아남았지만, 이후 치명적인 사고를 당했다. 다섯 살 때, 고구마를 구워먹던 장훈은 후진하는 차에 떠밀려 불 속에 오른손을 집어넣고 말았다. 당시 운전자를 잡으려 했지만 ‘조센징’이라는 이유로 경찰서에서 쫓겨났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병원도 치료를 거부했다. 장훈은 피나는 노력 끝에 왼손 투수, 왼손 타자로 거듭났다. 원폭 피해를 강조하며 평화의 상징으로 변신을 시도하는 히로시마에는 이렇듯 수많은 재일한국인들의 상흔이 깊게 새겨져 있다.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14만_명_사망#재일한국인들도_큰_피해
영상한국사 I 217 도쿄대공습과 조선인 희생자들
- 1945년 3월 10일, 도쿄 상공에 미군이 새로 개발한 신형폭격기 B-29 50여 대가 나타났다. 도쿄대공습은 미군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내린 선택이었다. 목조 건물이 대부분이던 도쿄는 한순간에 불바다가 됐고, 하룻밤에 1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엄청난 피해에 당황한 일본 내각은 일왕의 시찰을 앞두고 시신을 서둘러 가매장했다. 이때 도쿄 거주 조선인 10만 명 가운데 만여 명도 희생됐다. 한 방에 10명을 가두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문을 잠그기도 했고, 공습이 시작됐을 때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려 했으나 지리를 몰라 희생당하는 경우도 있어 피해가 더 컸다. 도쿄대공습 당시 가매장됐던 희생자들은 1948년 도쿄도 위령당 뒤편 납골당으로 보내졌다. 신원이 파악되지 못한 유골도 적지 않은데, 이름을 찾아낸 조선인 희생자는 49명으로, 창씨개명을 했지만 조선인만의 특징이 남아있어 그나마 파악이 가능했다. #미군 #도쿄대공습#도쿄 #거주 #조선인 #만여명희생#가매장
영상한국사 I 216 일본,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인 폭동설을 유포하다
-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한다.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 한 관동 지역 내에서 10만 여 명이 피해를 입었다.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지고, 도시는 무법천지가 되자 당황한 일본 정부는 수습책의 하나로 조선인 폭동설을 조작해 유포시키기에 이른다. 이것이 관동대지진 학살사건의 동기였다. 이때, 일본인 손에 학살당한 우리 동포는 한일당국이 파악한 바로는 6,661명이다. 그러나 2013년 발굴된 독일 외무성의 1924년 3월 영문사료에는 총 23,058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돼 있다. #일본 #관동대지진#조선인 #폭동설#조선인 #6천여명학살
영상한국사 I 215 일본 관동대지진 발생과 재일조선인 학살
- 1923년 9월 1일, 도쿄에서 규모 7.9의 지진이 발생했다. 순식간에 일본 관동지방은 폐허가 됐고, 일본 정부는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유언비어를 유포했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격분한 일본인들은 통행인을 검문하고, 조선인이라 판단되면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다. 당시 조선인 피해상황은 처참했다. 그러나 내무성 정보국이 발표한 희생자 수는 231명뿐이었다. 변호사였던 일본인 후세 다츠지는 이 엉터리 숫자를 논리적으로 추궁하며 직접 학살 현장을 조사한 뒤 조선인 희생자 수를 6천여 명으로 발표했다. 일본인으로서 학살을 막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며 일본 정부와 국민에게 반성을 촉구했던 그는 조선의 신문에 글을 게재해 일본인으로서 조선인에게 사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의 감시를 받고 있던 조선의 신문에 그의 사죄문은 실리지 못했다. #관동대지진#재일조선인 #6천명 #학살#변호사후세 #다츠지#학살사건 #사죄문
영상한국사 I 214 ‘까레이스키’들의 고된 삶
- 1863년, 한반도 북녘에 기근이 돌면서 살기 어려워진 농민들 13가구가 연해주 포시에트 지역으로 최초 이주한다. 이후 일제 치하 식민생활을 피하고,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연해주로의 이민이 급증한다. 연해주에 정착한 조선 사람들은 벼농사를 시작하고 정착의 삶을 일궈간다. 이때 이들 스스로가 ‘우리는 고려사람’이란 뜻의 꼬레사람이라고 칭한 것에서 까레이스키란 이름이 생겨난다. 이렇게 20여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연해주의 고려인 사회를 정착시켜 갔다. 1937년 스탈린은 한인들을 연해주에서 몰아내라는 명령을 내린다. 당시 연해주 정복을 노린 일본이 생김새가 비슷한 고려인들을 첩자로 이용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고려인들은 70여 년간을 꾸준히 일궈온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17만 2000여 명에 달하는 고려인 전원은 고향 연해주에서 강제로 쫓겨나, 우슈토베를 포함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떨궈져 모진 시간들을 살아내야 했다. 그들은 늪지대를 말리고 농기구 하나 없이 맨손으로 땅을 일구고, 그 허허벌판에 벼를 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뺏긴 채 급히 쫓겨 오는 와중에도 볍씨만은 몰래 숨겨온 것이다. 이렇게 고려인들은 우즈베키스탄을 주요 쌀농사 지역으로 변화시켰다. #연해주정착 #조선인#까레이스키#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강제이주
영상한국사 I 213 강제 이주 고려인들, 맨주먹으로 농사를 짓다
- 고려인들의 최초 정착지였던 카자흐스탄의 우슈토베는 원주민이 살다 버린 흙집 몇 채와 갈대만 우거진 척박한 땅이었다. 흙벽돌로 지은 이주 초기 고려인의 집은 특이하게 출입문이 두 개다. 자재가 부족해 두 가구가 동거하는 형태로 지었기 때문이다. 흙집조차 지을 수 없는 사람들은 토굴을 팠다. 추위와 풍토병으로 노인과 어린아이가 죽어나갔다. 그런 열악한 황경에서 낡은 농기구와 맨손으로 농사를 지었다. 메마른 땅에 수로를 파고 강물을 끌어들였다. 굶주림 속에서도 겨우내 보관한 볍씨를 뿌렸다. 수천 년 묵은 갈대밭이 서서히 옥토로 변했고, 소련 정부의 지원도 시작됐다. 1938년 가을, 기적처럼 첫 수확을 했다. 고려인들 덕분에 중앙아시아에도 벼농사가 가능해졌다. 적성민족으로 분류된 고려인이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는 교육이었다. 그러나 1938년, 소련당국은 한국어 교육을 철저히 금지했다. 강제이주를 당하고, 모국어 교육이 금지되면서, 고려인들은 러시아말을 배우고 철저히 사회주의화 됐다. 그것만이 적성민족의 딱지를 떼고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스탈린 #한인강제이주정책#카자흐스탄 #우슈토베 #최초정착#고려인 #벼농사성공
영상한국사 I 212 소련의 고려인 정치탄압과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 1937년 히틀러는 군사력을 증강하며 사회주의 소련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괴뢰국가 만주국을 앞세운 일본도 소련을 턱 밑에서 위협했다. 1937년 7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자 소련의 경계는 극에 달했다. 스탈린에게는 독일과 일본이 소비에트연방을 공격하는 사태가 가장 큰 위협거리였고, 연해주에 있는 조선인, 고려인들이 일본 군국주의와 내통할 것을 의심했다. 이를 봉쇄하기 위해 1937년 9월, 고려인들에게 갑작스런 이주 명령이 떨어진다. 수확을 앞둔 벼를 그대로 둔 채,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시베리아를 횡단해야 했다. 무려 17만 2,000여 명의 고려인들이 한꺼번에 연해주에서 6천km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것이다. #스탈린 #연해주 #고려인 #일본과내통우려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