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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알면서, 단재를 모르다니요!"

정기용기획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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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알면서, 단재를 모르다니요!"

[오마이뉴스 조성일 기자]

해마다 맞는 광복절이지만 60주년인 올해는 남다른 의미로 와 닿는다. 60이란 숫자가 십진법으로 떨어지는 숫자이기도 하거니와 사람의 육십갑자가 한 바퀴 돌고 다시 시작한다는 환갑을 의미하기에 성대하게 기리는 것이 우리네 풍습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남과 북, 해외에서 성대한 행사가 줄을 잇고 있고, 신문·방송도 여느 해와 달리 다양한 특집들을 다루고 있어 일단 겉치레는 그럴 듯하다.

이렇듯 특별한 이때 특별한 한 인물을 만나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그럼 누가 좋을까? 그야말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라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한반도가 아직 분단국이란 점을 감안, 남과 북이 모두 존경하는 인물이라면 금상첨화이리라.

그런 인물이라면 손으로 꼽아볼 수 있을 터, 신채호, 홍범도, 정약용, 전봉준 등으로 압축되는데, 때마침 나온 <단재 신채호 평전>(시대의창 펴냄)이 우리의 고민을 덜어준다.

해서 <단재 신채호 평전>을 쓴 김삼웅(62) 독립기념관장을 만나 단재의 삶과 정신에 대해 들어봤다. 김삼웅 관장과의 인터뷰는 광복절 기념행사 준비가 한창인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11일 이루어졌다.

온몸으로 일제와 싸운 처절한 혁명가

“단재의 생애는 망국시대에 모든 것을 바쳐 일제와 싸운 처절한 혁명가의 삶이었습니다. 선생은 개인은 물론 가족의 안위와 영달 따윈 안중에 두지 않고 오직 일제의 타도와 조국의 해방만을 위해 살다 가신 분입니다.”

<단재 신채호 평전>의 저자 김삼웅 관장은 십 수 년 준비한 책을 이제야 내놓게 되었다며 혹시 자신의 작업이 선생을 그리려다 선생의 뼛속까지는 고사하고 선생의 겉모습조차 제대로 그리지 못한 것은 아닌지 걱정부터 앞선다고 했다.

“세계 피압박 민족 해방운동사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단재와 같은 지식인 혁명가가 있었기에 일제 강점기가 꼭 그렇게 패배와 좌절의 시대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 관장의 단재에 대한 평가는 흠모에 가까웠다. 김 관장은 이 책이 생애의 정사곡직(正邪曲直)과 후대의 공정한 평가를 담아내야 하는 평전이라는 점에서 의식적으로 단재의 흠결을 찾으려고 해도 찾지 못했다고도 했다.

더군다나 단재가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지냈듯 그 역시 <대한매일신문> 주필을 지낸 이력 때문인지 김 관장은 단재와의 개인적 인연을 ‘운명’으로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단재는 격동의 시대에 지식인에게 주어진 사명은 거의 다 한 인물입니다. 당시 성균관 박사로서 장래가 보장되어 있었지만 단재는 그 기득권을 버리고 행동하는 지성으로서 실천의 길에 나섰습니다. 씹던 껌도 버릴 땐 수없이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 아닙니까. 애국혼으로 뭉쳐진 사학자이자 언론인이셨던 그 분은 민족사의 모순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극복하려 했습니다.”

“품은 뜻은 천도였고, 잡은 붓은 사필이었다!”



▲ 단재가 북경에서 발행했던 순한문잡지 <천고>(왼쪽)와 독립선언문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조선혁명선언'(오른쪽)

ⓒ2005 김삼웅

전통유학자에서 개명유학자로, 또 공화주의자로 이념의 변화를 가졌던 단재는 일제시기엔 무장투쟁을 견지한 혁명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일제시대 발표된 수많은 독립선언문 중에서 내용과 문장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의열단선언문’으로 불리는 ‘조선혁명선언’에서 단재는 폭력에 의한 민중의 직접혁명을 이렇게 부르짖었다.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토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여 온갖 만행을 거침없이 자행하는 강도 정치가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혁명으로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하자는 것이 조선민족의 정당한 수단이다.”

이렇듯 단재는 서릿발 같은 자세로 일제와는 터럭끝만치도 타협하지 않았던 불굴의 애국지사라고 김 관장은 평가한다.

특히 단재가 북경 망명 시절 유일한 호구 수단인 <북경신문>의 기고마저 어조사인 ‘의(矣)’ 자를 편집자가 임의대로 뺐다고 하여 사장이 직접 찾아와 사과해도 끝내 기고를 거부했던 지사적 언론인의 결기와 행동이 바로 단재정신이라고 김 관장은 설명했다.

“특히 왜놈에게 고개를 숙이기 싫어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세수를 하였던 단재는 가슴속에 만 권의 독서량이 쌓여서 피어나는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넘쳐야 한다는 추사가 말한 선비의 자질에다 문사철, 무장투쟁, 직접혁명론을 갖추었고, 비록 체구는 왜소하고 말은 어눌했지만 품은 뜻은 천도(天道)였고, 잡은 붓은 사필(史筆)이었고, 행동은 가히 천하대장부였습니다.”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우리가 역사를 말할 때 유식한 체 하며 으레 아놀드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이나 E.H. 카의 ‘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대화’를 인용하면서도 정작 단재의 그 유명한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은 외면하는 현실을 김 관장은 개탄했다.


김삼웅은 누구인가


현재 독립기념관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김삼웅은 친일문제연구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20대 초반 잡지 <사상계> 신인논문상에 입선되면서 문필생활을 시작했고, 1970년대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 야당의 기관지를 맡아 발간하는 일에 앞장섰다.

아태평화재단 기획조정실장과 <대한매일신문>의 주필을 지내기도 한 김삼웅은 성균관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그가 쓴 책으로는 <친일정치 100년사> <한국민주사상의 탐구> <해방 후 양민학살사> <금서> <한국필화사> <곡필로 본 해방 50년> <한국현대사 바로잡기> <겨레유산 이야기> <왜곡과 진실의 역사> <아나키스트 박열 평전> <일제는 조선을 얼마나 망쳤을까> <을사늑약 1905 그 끝나지 않은 백 년> <백범 김구 평전> 등이 있다. / 조성일 기자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사회의 ‘아와 비아’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생하여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 하면 조선민족의 그리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조선상고사> 총론 중에서)

여기서 단재가 말한 ‘아와 비아의 관계’는 국가와 민족의 대립, 지주 자본가와 무산계급의 대립을 말하며 이러한 대립의 투쟁은 쉼 없이 계속된다고 했다.

“단재의 사관은 뚜렷한 자아 주체론입니다.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정의하고 조선민족을 아의 단위로 삼아 정치 사회 등 각 분야의 소장성쇠를 서술하는 것이었습니다.”

단재는 사학자로서 민족사학의 골격을 세웠을 뿐 아니라 한국고대사 복원은 물론 잘못된 역사의 과오와 왜곡된 역사에 대해도 비판의 칼을 들이댔다.

“단재는 삼국사기를 백번 읽는 것보다 만주지역 고구려 유적지를 한 번 돌아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설파하면서 고픈 배를 움켜쥐고 조상의 고토를 찾아다니며 고대사를 썼습니다. 우리가 단재의 고대사 연구만 제대로 배웠대도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 따위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겁니다.”

<조선상고사>를 비롯한 수많은 저작물을 통해 역사 연구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단재사학은 단군조선의 수두제전(단군제)에서 민족의 기원을 찾고 영고·동맹·무천·소도 등 부족국가 열국의 민족제전, 고구려의 선배제도, 신라의 화랑제도로 성장 발전해왔다는 낭가사상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특히 단재는 애국심과 자강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같은 해외 역사 서적을 번역했고,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과 <동국거걸 최도통전> 등 한국 사상의 영웅들의 책을 직접 저술하는 영웅사관을 견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3·1운동을 통해 지도자들은 다 빠지고 의혈단 같은 민중들만 나서는 것을 보고 단재는 영웅사관을 폐기하고 민중의 직접혁명론을 이념으로 삼고 활동하기 시작한다.

“남북이 공동으로 <단재전집>을 발간하자!”

몇 년 전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30주기를 맞아 그의 평전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그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젊은이들이 거리에 넘쳐나고, 신문들이 앞 다투어 그에 관한 특집을 꾸미는 등 야단법석을 떠는 것을 보고 김 관장은 다소 씁쓰레한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체 게바라 역시 유능한 혁명가로서 충분한 대접을 받을만한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투사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민족해방을 위해 일제와 혈전을 벌이다 차디찬 뤼순감옥에서 쓸쓸히 고단한 삶을 마친 단재 선생의 30주기, 50주기, 그리고 60주기를 우리는 어떻게 보냈습니까? 내년이 70주기가 되는 해입니다. 지금부터 참된 의미를 되새기는 일들을 모색해야 합니다.”

단재에 대한 우리의 홀대는 그뿐이 아니다. 눈 밝은 독자들은 가끔 언론에 회자되고 있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긴 하지만 단재를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여태껏 국적조차 회복이 안 된 상태이다.

“선생의 혼백이 깃든 망명기의 유고는 남북과 중국, 일본에 흩어져 여전히 ‘망명’ 신세고, 유족은 신산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물구덩이에 잠긴 채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무덤은 파헤쳐져 가묘상태에 있고, 오자투성이인 묘비문은 바로잡을 날을 기약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김 관장은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단재 선생을 기리자며 늦었지만 가묘 상태를 방치할 게 아니라 국민들이 함께 하는 ‘민주시민장’을 치러 국립묘지에 안장하자고 제안했다. 아울러 북한 인민문화궁전과 국내외 산재한 유고를 모아 남과 북이 공동으로 단재 선생의 전집을 발간하자고 했다.

또한 단재 아들 수범씨가 제기한 죽음에 대한 의문도 풀어야 할 숙제라고 했다. 이 점에 대해서도 김 관장은 여러 차례 루쉰감옥을 방문하여 자료를 찾으려 했으나 감옥에서 찍은 사진 한 장과 화장터를 확인하는데 그쳤다며 죽기 얼마 전 건강하다는 전보를 받았는데 갑자기 죽었다는 점과 시신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고 서둘러 화장하는 등 석연치 않은 점이 한 둘이 아니라고 했다.

어쨌든 김삼웅 관장은 이번 평전 작업이 힘에 부치는 작업이었지만 단재의 삶과 죽음, 투쟁과 애국혼에 흠뻑 빠져 글쓰기를 멈출 수 없었다며 가없는 사상의 봉우리와 깊이를 알 수 없는 학문의 심연을 확인하는 소중한 기회였다는 말로 인터뷰를 갈무리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 약력


- 1880년 11월7일 충남 대덕군 정생면 익동 도림리에서 신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 1895년 첫부인 풍양조씨와 결혼
- 1898년 신기선 추천으로 성균관에 들어감
-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됨
- 1906년 <대한매일신보> 주필이 됨
- 1907년 ‘신민회’에 가담
- 1910년 안창호, 이갑, 이종호, 등과 청도를 거쳐 해삼위로 망명
- 1914년 고구려 유적 답사
- 1918년 북경의 보타암에서 <조선사> 집필
- 1919년 대한독립청년단 단장이 됨
- 1920년 박자혜와 재혼
- 1921년 맏아들 수범 출생. 한문체 잡지 <천고> 발행
- 1922년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등 저술
- 1923년 의열단 요청으로 ‘의열단 선언문’ 작성
- 1924년 임시정부가 창조파를 탄압하자 북경으로 가서 ‘다물단’ 조직
- 1928년 대만 무정부주위 비밀결사 사건에 관련, 국제 위체 사기문제로 대련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 10년을 받고 루쉰감옥에서 복역
- 1936년 2월18일 루쉰감옥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3일 후인 21일 오후 4시20분 옥사. 다음날 오전 11시 화장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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