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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항일영웅 김경천

정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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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항일영웅 김경천

[경향신문 2005-09-05 18:03]


항일영웅 김경천 장군





“힘들게 살았지만 독립운동을 하신 외할아버지를 ‘마음속 영웅’으로 간직하며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광복 60돌 8·15를 앞두고 처음 한국을 찾은 김 발레리 비탈리예비치는 외할아버지의 나라가 결코 낯설지 않다고 했다. 카자흐스탄 태생인 김 발레리는 시베리아의 항일영웅 김경천(金擎天·1888~1942)의 외손자. 그는 “지금도 외할아버지는 많은 러시아 한인들에게 ‘김장군’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다”며 “고국에서는 할아버지를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김경천은 낯설다. 그러나 1920년대만 하더라도 그는 러시아 한인은 물론 국내 동포들에게도 독립운동의 영웅이자 ‘전설’이었다.


‘전설’이 ‘역사’로 기록된 것은 1990년대에야 가능했다. 한·러간 수교가 되고 유족의 증언들이 확보된 1998년에야 우리 정부는 그의 항일투쟁을 공인하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김경천은 함남 북청에서 무관 양반가의 5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일본 유학을 떠난 것은 1904년. 서울에서 경성학당을 마친 뒤였다.


일본에서 김경천은 5년과정의 육군중앙유년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1911년 육사를 졸업한 그는 일본 육군 기병소위를 거쳐 중위로 진급한다. 그의 앞에는 조선 사람으로서는 밟기 힘든 엘리트 군인의 길이 열려 있었다.


일본군 장교로 전도가 양양했던 김경천은 1919년 들어 국외로 탈출할 것을 결의한다. 육사 재학시절 조국이 일제에 강제로 합병되자 실의에 빠진 그에게 1919년 일어난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은 그가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2·8선언 직후 병을 핑계로 휴가를 내 고국으로 돌아온 김경천은 서울에서 3·1운동을 목격한다. 이를 계기로 해외 망명의 뜻을 확실히 굳힌 그는 그해 6월 육사 후배 지청천과 함께 만주 망명을 단행한다(지청천은 뒷날 광복군 총사령관에 오른다).


망명 직후 김경천은 남만주 유하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교관으로 활동한다. 당시 이 학교에는 김경천 이외에 신동천, 지청천도 교관을 맡고 있어, 이들은 ‘남만주의 삼천(三天)’으로 불렸다.



1910년대 일본 육사 시절의 김경천 장군. 김장군은 뒷날 시베리아에서 항일투쟁을 벌일 때 흰 말을 타고 부대를 지휘. ‘백마탄 장군’ 으로 불렸다.

1919년말께 김경천은 무기 구입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간다. 그러나 일본군의 감시가 심하자 삼림지대인 수청(현재 파르티잔스크) 지역으로 이동, 그곳의 창해청년단 총사령관을 맡는다. 당시 그 지역에는 중국인 마적들이 날뛰었는데, 김경천은 한인 보호를 위해 마적 소탕에 전력을 기울이는 한편 항일 빨치산 활동을 전개했다.


1921년 연해주 지역에서 300여명의 통합 빨치산 부대가 조직되고 김경천은 지도자로 선출됐다. 그는 러시아 홍군과 연합해 백군들과 전투를 벌이는 한편 연해주 지역의 무장항일 투쟁을 이끌었다. 일본 육사에서 기병술을 익힌 김경천은 당시 흰 말을 타고 다니며 빨치산부대를 지도, 한인들은 물론 러시아 사람들에게도 ‘백마 탄 김장군’으로 불렸다.


김경천의 명성은 서울에까지 알려져 당시 나혜석의 오빠 나경민은 김경천의 항일활동을 현지 취재, ‘노령견문기’라는 이름으로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김경천은 1920년대 초반 러시아 무장항일투쟁의 제1인자였다. 김경천의 항일투쟁을 연구한 수원대 박환 교수는 “김좌진과 홍범도가 만주지역의 무장투쟁을 대표한다면 러시아에서는 김경천이 손꼽힌다”며 김경천을 시베리아의 대표적 항일영웅으로 자리매김했다. 박교수는 또 “김경천은 일본 육사에서 기마술 등 선진적인 전략·전술을 익혀 어떠한 독립운동가보다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벌일 수 있었다”며 “일본군 장교 출신의 무장항일투쟁은 당시 일본인에게 매우 센세이셔널한 대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1923년 이후 김경천은 실의에 빠진다. 1922년 12월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러시아 혁명군사위원회가 무장해제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김경천은 이후 상해로 가 새로운 독립운동을 모색했지만 곧바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무관학교 설립 등을 추진하고 극동사범대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온건한 항일운동을 펼쳤다. 그러던 중 1930년대 스탈린 정권의 숙청작업 때 일본의 간첩으로 몰려 옥고를 치렀다. 1939년 출옥한 뒤 강제이주된 가족을 찾아 카자흐스탄으로 건너갔으나 또 다시 간첩죄로 시베리아로 유배돼 1942년 숨졌다. 그러나 정확한 사망장소, 일시, 원인 등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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