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이준 민영환 진정 열사인가
정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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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2005-05-13 18:12]
[한겨레]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일제 위해 의연금 걷다 체포됐지만 항일로 전향… 할복자살한 것처럼 역사책에 꾸며진 ‘왕조영웅’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사회적 ‘합의’의 무게가 압도적이라서 그런가. 보통 우리는 ‘영웅’으로 정해진 사람에 대해 다각적으로 알거나 그의 모순점을 파헤치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100년 전 ‘영웅 대접’은 더 장대했다. 예컨대 1905년의 을사늑약에 반대하다가 자결한 것으로 유명한 민영환(1861~1905)의 경우를 보자. 그가 자결한 지 약 8개월이 되어 피 묻은 옷이 있었던 방에 혈죽(血竹)이라 부르는 청죽이 솟아올랐다는 것이 장안의 화제가 되어 이 혈죽이 상징하는 민영환의 ‘피의 충군애국’은 개화파 인사들에 의해 ‘국민적’ 행실의 전범으로 찬양됐다.
신문에 실려 인구에 회자된 <혈죽가>에서는 “놀랍고도 신긔하다 우리 민충정/ 어리석고 블상하다 우리 국민들(…)/ 대한 중흥 어서 해보셰”라고 하여 사후에 기적을 일으켰다는 민영환을 ‘어리석고 불쌍한 백성’의 스승으로 삼았다. 나라가 무너져가는 시대에 자살이라는 소극적 형태로라도 저항을 보인 민영환이 친일하거나 보신주의로 일관한 다수의 고관대작과 대조적으로 군계일학으로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민영환 영웅 만들기에 앞장섰던 <대한매일신보> 등 매체들이 절대 언급하지 않았던 사실도 있었다. 탐욕으로 임오군란을 촉발해 군란의 와중에서 피살된 민겸호(1838~82)의 아들 민영환이 22살의 나이로 벌써 정3품의 성균관 대사성(국립대학 총장)이 되고 그 뒤 30살도 채 되지 않아 홍문관 부제학, 이조참판, 호조판서, 병조판서(국방부 장관)까지 두루 역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가 척족 민씨 족벌의 핵심적 소장 멤버라는 태생적 신분이 있었던 것이다. ‘빽’에 의한 출세가 빠르면 욕망도 비범해지는 법이라던가. 전봉준(1854~95)의 공초(供草·신문기록)에는 민영환이 매관매직·부정부패의 주역으로 지목되고 있다. 어느 정도가 사실인지 지금 확인할 길이 없지만 1890년대 전반에 민영환이 매관매직을 주관한 고종과 민비의 신임을 받았던 만큼 전혀 사실무근은 아니었을 것이다.
민영환의 중요한 공적으로 러시아와 유럽 각국, 일본 등지를 무대로 한 외교 활동이나 독립협회 등 개화파 조직들과 (민씨 척족으로서 이례적인) 가까운 관계 등의 ‘개방성’을 들지만, 러시아·일본 양쪽과 거리를 두고 미국의 도움에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한 개화적 외교관 민영환의 친미 노선이 필연적인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는 것도 기억해둘 만하다. 미국에 의존하려는 것은 러·일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 했던 고종과 측근의 바람이었지만 이미 일본의 손을 들어준 미국이 민영환과 고종의 밀사로 1904년 말 도미한 이승만의 애원을 들어줄 리 만무했다. 결국 민영환의 자결은 장렬한 순국이면서도 백성을 수탈하면서 외세에 의뢰하려는 고종과 그 측근들의 ‘외교를 통한 독립 유지 노선’의 파산 선고였다. 제때 죽기라도 할 줄 알았던 민영환은 그가 국민에 대한 사랑이란 의미의 ‘애국’이기보다는 자신에게 부귀를 선사해준 고종에 대한 충성심, 즉 ‘충군’에 더 강조를 두었던 왕조의 영웅이었던 셈이다. 그를 ‘국민의 영웅’으로 만들어준 것은 그 죽음의 비장함과 생시의 친미적 지향 등을 높이 사주어 그를 ‘모범적 근대인’으로 재해석한 <대한매일신보> 등의 ‘국민 만들기’ 캠페인 일환이었다.
민영환은 밀사 파견을 중심으로 한 왕조 외교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결했지만 외교의 최종 결정판이라 할 헤이그 사건의 한 주인공으로 그 외교의 과정에서 비극적으로 죽은 사람은 학교 교과서를 통해서 익히 알려진 이준(1858~1907) 열사다.
이준은 어떻게 고종의 신임을 얻었는가
우리는 교과서를 달달 외워 그를 ‘열사’로만 알지 머나먼 함경남도 북청의 지방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이준이 과연 어떻게 밀사가 될 정도로 고종의 신임을 얻었는가와 같은 의문을 가지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함께 밀사의 길에 오른 이상설(1870~1917)은 석유(碩儒)로서 명성이 자자해 한때 성균관의 교수·관장을 역임한데다 독학으로 영어를 배운 거물 개신 유림이었고, 이위종(1887~?)은 프랑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주러 공사를 역임하던 아버지 이범진(1852~1911)과 함께 러시아에서 살아 노어까지 능통한 서구 지향적인 인사임에 반해 이준의 주요 학력은 친일 내각이 세운 법관양성소 졸업(1895년 11월10일)과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한 법학 공부(1896~98)가 전부다.
개신 유림이나 서구 지향적 개화파의 반일은 쉽게 이해되지만 일본 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서 항일의 대열에 선 이들은 극소수였다. 더군다나 러일전쟁이 발발한 시점에 이준은 (당시 아시아주의에 물든 많은 개화주의자와 마찬가지로) 일본이 “같은 황인종으로서 한국의 독립을 러시아로부터 지켜준다”고 인식해 일군을 ‘위로’하고 “일본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시”하기 위해 의연금을 거두려다 잡혀간 적이 있는 사실(<대한계년사> 권7, <황성신문> 1904년 3월23일치 잡보)까지 생각해본다면 더욱 어리둥절해진다. 한때 ‘친일’로 체포까지 당한 사람이 어떻게 해서 나중에 ‘항일’의 열사가 된 것인가.
‘백인종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승리를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한국 토지약탈 계획이었던 ‘황무지 개간안’이나 주구단체인 일진회의 배후 조종, 한국의 국권을 유린한 고문정치 등으로 일본 침략의 마각이 노출되어 일진회와의 투쟁의 최전선에 나서게 된 이준의 심기가 일전된 부분도 있었지만 당시 정치의 주된 요소였던 인간관계는 그를 급격히 반일로 전환시켰다. 1890년대 후반부터 이준의 후견인이 되어 1902년에 그를 ‘개혁당’이라는 비밀 결사에 참여시킨 민영환이 일본 침략에 외교적 방법으로 맞선 것도 영향을 주었지만 무엇보다 같은 함경도 출신으로서 고종의 절대적 신임을 받아 막대한 비자금을 국내외에서 관리하면서 동향인 이준에게 운동 자금을 주었던 이용익(1854~1907)이 국내외 반일 여론 조성에 나선 것은 중요했다. 이준 등의 주도하에 일진회에 맞서기 위해 보부상 조직을 바탕으로 1904년 12월에 만든 공진회의 경우 이용익을 통해 궁정의 자금을 받아 운영됐을 가능성이 크다. 이준과 한국 공산주의 선각자가 될 이동휘(1873~1935) 등 함경도 출신의 개화인사들이 1906년 10월 말 설립한 ‘한북흥학회’라는 지방 계몽단체도 이용익에게서 자금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동휘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를 “생존경쟁의 시대에 나라를 계몽시켜 일으켜세울 문명 종교”로 인식해 입교한 이준은 결국 전덕기(1875~1914) 목사 등을 통해서 궁정쪽과 직접 상통해 고종에게서 위임장을 받아 돌아오지 않을 헤이그로의 길에 오르게 된다. 원래 헤이그 평화회의에는 그의 은인 이용익이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용익이 1907년 2월24일에 갑작스럽게 죽는 바람에 헤이그행이 이상설과 이준, 이위종의 몫이 된 것이다. 열강의 대표들이 조선의 사정을 들어주지 않는 데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 이준은 고질병이었던 뺨 종기가 갑자기 악화되어 그만 헤이그에서 분사(憤死)하고 말았다. 그러나 일본쪽의 검열로 헤이그행의 본말을 제대로 알 수 없었던 국내에서는 이준이 만국 대표가 보는 앞에서 할복자살했다는 등의 ‘영웅 전설’들이 1960년대 초까지 거의 사실(史實)로 인정받았다.
헤이그에서 고질병이던 뺨 종기로 분사
‘같은 인종’으로 생각했던 일본의 침략성을 뒤늦게나마 간파하고 목숨과 재산을 생각하지 않고 밀사라는 험한 길에 나선 이준은 영웅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면 조선 백성을 주체적 시민으로 삼아 항일적 시민운동에 함께 앞장서는 대신, 이권 독점과 각종 수탈로 모은 내탕금의 자금을 성과가 없을 게 뻔한 밀사 외교에 쏟아부었던 고종과 민영환, 이용익 등의 황실·민씨 척족세력은 어떤가. 열사 이준을 분사로 몰아넣은 것은 일본 침략과 열강의 무관심이기도 했지만 결국 백성과 국가를 개인 재산쯤으로 생각하고 강국들에 의지하려고만 했던 황실세력의 반역사적 태도였다. 이는 궁극적으로 불가피한 참패를 안고 있었다.
참고문헌: 1. 유자후, <이준선생전>, 동방문화사, 1947.
2. 반병률, <성재 이동휘 일대기>, 범우사, 1998.
3. 윤병석, <이상설전> 증보판, 일조각, 1998.
4. 서영희, <대한제국 정치사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