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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자료실
영상자료
총 95건
영상한국사 I 164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에서 발견된 초기 의열단 사진
- 의열단의 이름은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는 공약을 담고 있다. 창립 초기의 사진에는 일곱 애국지사들의 의연한 모습이 담겨있다. 김원봉 단장, 이성우 선생, 김기득 선생은 만주 옷을, 다른 대원들은 양복을 갖춰 입었다. 1920년 봄, 상하이에서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사진은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에서 발견됐다. 대부분 타지에서 생을 마감한 의열단 단원들은 100년 만에 한 장의 사진으로 되살아났다.
영상한국사 I 163 단재 신채호, 의열단을 위해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다
-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은 6천 4백여 자에 이르는 장문으로 조선민족을 주체로 한 혁명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혁명을 위해 제거할 대상까지 밝히고 있다. 신채호는 투쟁의 방법으로 무력을 선택했다. 독립을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폭력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1920년 북경은 당시 외교활동에 치중하던 임시정부와 독립의 방법을 달리했던 항일세력의 활동무대였다. 그 중심에 있었던 신채호는 북경에서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가까워진다. 김원봉과 신채호는 무력투쟁 노선을 같이했던 동지였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길림에서 결성됐다. 그들은 암살과 폭력, 파괴를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삼았던 항일비밀 결사단체였다.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의열단이 선택한 폭력투쟁방법은 때로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23년 1월,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을 완성한다. 이후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사건, 김지섭의 동경 2중교 폭탄투척 사건(1924년) 등 의열단의 활동은 한층 치열하게 전개됐다.
영상한국사 I 162 의열단의 5파괴 7가살 원칙과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 1919년 3월, 호소, 시위, 항의 등의 방법을 이용한 평화적인 혁명운동을 일본은 참혹하게 억압했다. 혁명운동에 가담한 일부 인사들은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실현할 수 없다는 데 공감했다. 1919년 11월 9일, 지린성 외곽의 외딴집으로 김원봉과 그의 학교, 고향 동료들이 모였다. 밤새 회의를 한 이들은 전부터 뜻을 모아온 항일결사조직의 결성을 선언한다. 그것이 바로 1920년대 일제의 주요기관 파괴와 요인 암살로 세상을 놀라게 한 의열단의 탄생이었다. 김원봉은 불과 22살의 나이에 만장일치로 의열단 단장에 추대된다. 의열단에는 오파괴 칠가살이라는 원칙이 있었다.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다섯 개의 주요 파괴 대상과 조선총독 이하 군부수뇌 등 7가지의 반민족 인사 암살 대상을 규정한 것이었다. 1923년 1월, 김원봉은 단재 신채호와 의논해 조선혁명선언(의열단선언)을 발표한다. 폭력투쟁으로 독립과 사회 변혁을 이룰 것을 천명했다. ※ 5파괴 –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주요 식민통치 기관 ※ 7가살 – 고관, 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적의 밀정, 반민족적 토호(土豪)
영상한국사 I 161 비밀결사 형태의 무장독립단체, 의열단의 행동강령
-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후, 경성거리에는 연일 호외가 뿌려졌다. 일본 경찰은 비상에 빠졌다. 일본 경찰은 사건의 배후로 의열단을 지목했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는 조선 독립의 불씨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의열단은 약산 김원봉이 1919년 11월 만주 길림에서 조직한 항일무장독립운동단체로, 부대 개념의 무장독립군이 아닌 비밀결사 형태였다. 의열단의 행동강령은 7가살 5파괴였다. 반민족적 인사들에게는 독립운동 자금을 징수했다. 응징 일변도의 행동에서 벗어나 바람직한 성과를 얻고자 한 것이다. 의열단은 무차별적 테러가 아니라, 일제의 심장부를 겨냥한 계획적 의거를 벌였다. 일제의 살벌한 감시망을 피해 밀정을 이용하기도 했다.
영상한국사 I 160 의열단의 목숨을 건 항일투쟁
- 1920년 9월 14일, 부산경찰서 폭탄투척의거로 경찰서장 하시모토가 사망했다. 1921년 9월 12일, 조선총독부 폭파의거가 발생했다.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26살의 청년 박재혁과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27살의 청년 김익상은 의열단원이었다. 1919년 11월 만주에서 약산 김원봉을 주축으로 조직된 항일무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은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행한다는 원칙 아래 뭉쳐, 일제 관공서를 파괴하고 일본 요인을 암살했다. 1921년 일제식민통치의 심장부를 쑥대밭으로 만든 김익상은 아수라장을 유유히 빠져나와 북경으로 피신했다. 그는 6개월 뒤인 1922년 3월 28일, 상해 황포탄에 도착한 일제 군부의 거물이자 침략주의자였던 다나카 기이치 처단을 시도했다. 의거는 성공하지 못했고 그는 피신 중에 체포된다. 의열단원 박재혁은 일제의 사형선고 후, 왜놈 손에 죽느니 스스로 죽겠다며 단식했고 1921년 5월 11일 순국한다. 밀양경찰서 투탄의거 의열단원 최수봉은 1921년 7월 8일, 일제의 사형집행으로 순국한다. 종로경찰서 폭파의거 의열단원 김상옥은 일제와의 총격전 끝에 자결한다. 도쿄왕궁 투탄의거 의열단원 김지섭은 1928년 2월 20일 일본에서 옥중 순국한다. 동양척식주식회사-조선식산은행에 투탄 의거한 의열단원 나석주는 일본경찰과의 총격전 끝에 자결한다.
영상한국사 I 159 강우규. 신임총독 사이코 마코토에게 폭탄을 던지다
- 1919년 9월 2일, 신임 조선총독 일행이 남대문역에 도착했다. 해군제독 출신의 3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마차에 오른 순간, 마차 앞으로 폭탄이 투척됐다. 폭탄은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불기둥이 일고 땅이 깊이 패어나갈 정도로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총독을 태운 마차는 서둘러 현장을 떠났다. 단 한발의 폭탄이었지만 현장은 참혹했다. 오사카 조일신문 등 신문기자들과 일본 육군소장과 경찰서장 등 귀빈실에 모여 있던 30여 명이 부상을 당하고, 이들 중 세 명이 사망했다. 폭탄을 던진 사람은 65세의 노인 강우규였다. 강우규의 의거는 조선의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최초의 의열투쟁이었다.
영상한국사 I 158 노인동맹단 강우규, 3.1운동 후 최초의 의열투쟁을 벌이다
- 젊은 시절 한약방을 운영하며 상당한 재산을 모았던 강우규는 경술국치 이후 중국으로 망명했다. 1915년 길림성 요하현에 정착한 그는 광동학교를 세워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고, 만주 각지의 독립운동세력을 연결할 거점을 만드는데 힘썼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요하현 일대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한 노인동맹단의 일원으로 강우규는 총독 암살 계획에 자원했다. 46세 이상부터 70대까지 나이 제한을 둔 노인동맹단은 한말의 격동기를 겪으면서 조국의 운명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세대였다. 1919년 9월 2일, 65세의 노인 강우규는 서울역에 도착한 신임 조선총독 사이코 마코토가 마차에 오르는 순간 폭탄을 던진다. 일본육군소장과 경찰서장 등 30여 명이 부상을 입고 3명이 사망했다. 비록 총독 암살은 실패했지만, 3.1운동 이후 최초의 의열 투쟁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의거 16일 후인 9월 17일. 강우규는 조선인 순사 김태석에 의해 체포된다. 그의 재판에는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강우규는 법정에서 두 차례 의자를 집어던지는 등 거침이 없었다. 판검사가 반말로 질문하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결국 1920년 5월 27일 일제는 강우규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같은해 11월 29일, 독립운동가 강우규가 순국했다.
영상한국사 I 157 ‘까레이스키’들의 고된 삶
- 1863년, 한반도 북녘에 기근이 돌면서 살기 어려워진 농민들 13가구가 연해주 포시에트 지역으로 최초 이주한다. 이후 일제 치하 식민생활을 피하고,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연해주로의 이민이 급증한다. 연해주에 정착한 조선 사람들은 벼농사를 시작하고 정착의 삶을 일궈간다. 이때 이들 스스로가 ‘우리는 고려사람’이란 뜻의 꼬레사람이라고 칭한 것에서 까레이스키란 이름이 생겨난다. 이렇게 20여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연해주의 고려인 사회를 정착시켜 갔다. 1937년 스탈린은 한인들을 연해주에서 몰아내라는 명령을 내린다. 당시 연해주 정복을 노린 일본이 생김새가 비슷한 고려인들을 첩자로 이용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고려인들은 70여 년간을 꾸준히 일궈온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17만 2000여 명에 달하는 고려인 전원은 고향 연해주에서 강제로 쫓겨나, 우슈토베를 포함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떨궈져 모진 시간들을 살아내야 했다. 그들은 늪지대를 말리고 농기구 하나 없이 맨손으로 땅을 일구고, 그 허허벌판에 벼를 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뺏긴 채 급히 쫓겨 오는 와중에도 볍씨만은 몰래 숨겨온 것이다. 이렇게 고려인들은 우즈베키스탄을 주요 쌀농사 지역으로 변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