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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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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95건
영상한국사 I 177 의열항쟁의 변화 - 김원봉과 의열단원의 중국 황푸군관학교 입학
- 1925년 가을, 김원봉은 의열단을 이끌고 광저우로 이동한다. 손문이 주도하는 국민혁명의 거점이자 동북아정치의 중심지였던 광저우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새로운 활동무대가 됐다. 조직의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 광저우에서 김원봉과 20여명의 의열단원들이 선택한 것은 황푸군관학교 입학이었다. 김원봉은 개인적인 암살파괴 투쟁에 그쳤던 의열단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직적인 투쟁방법을 배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황푸군관학교에서 얻은 것은 단순한 군사지식만이 아니었다. 중국의 혁명사상을 학습했고 공산주의 혁명이론 등 진보적인 사상도 접했다. 이 과정에서 의열단원들은 강인한 독립운동 지도자로 단련됐다. 다양한 인맥을 형성해 향후 독립운동의 지원군을 얻게 된 것도 큰 수확이었다. 김원봉은 당시 교장이었던 군부의 장제스, 정치부 교관이었던 공산당의 저우언라이 등 중국 정계의 주요 인물들과 친분을 쌓는다.
영상한국사 I 174 의열단, 일본 주요 기관에 폭탄을 던지다
- 의열단은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폭탄 투척을 주모했다. 1920년 9월 14일, 의열단원 박재혁이 부산경찰서 서장에게 폭탄을 던졌다. 1920년 12월 27일, 최수봉이 밀양경찰서 사무실 안에 폭탄을 던졌다. 첫 번째 폭탄은 불발했지만 두 번째 폭탄은 폭발했다. 1921년 의열단 단원 김익상은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투척했다. 마찬가지로 하나는 불발했지만 다른 하나가 폭발해 건물 일부가 파괴됐다. 실패로 돌아간 1922년 3월 28일 상해 황포탄 의거까지 의열단은 수많은 폭발 의거를 도모했다. 이전까지 독립운동가들이 쓴 폭탄은 조악했지만 종로경찰서에 투척된 폭탄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영상한국사 I 170 김상옥과 일본 경찰이 벌인 1대 1,000의 전쟁
- 김상옥 의사는 종로경찰서 폭파 이후 여동생의 집이 있던 삼판동으로 몸을 피했다. 김상옥 의사가 삼판동에 몸을 숨긴 또 다른 이유는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을 서울역에서 저격, 암살하기 위해서였다. 1월 17일 사이토 총독 암살 거사일 새벽 5시, 김상옥 의사와 일본 경찰 사이의 총격전이 벌어진다. 김상옥 의사는 총독 암살 거사를 실현하지 못한 채 다급히 남산으로 몸을 피해야만 했다. 그는 200여 명의 일본 경찰의 집요한 추격을 따돌리면서 종로구 효제동으로 돌아왔다. 효제동은 어린 시절 친구이자 정보 연락책을 맡았던 동지 이혜수의 집이 있었다. 이혜수는 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애국지사들의 비밀연락을 맡아 활동한 여성 독립 운동가였다. 효제동에 몸을 숨긴 김상옥은 비밀리에 동지들을 만나 일본 경찰들의 움직임을 살핀다. 1923년 1월 22일 새벽, 경찰과 군인 1,000여 명이 이혜수의 집을 포위했다. 3.1운동 이래 최대 규모의 일본 경찰이 동원된 총격전에서, 김상옥 의사는 홀로 일본 경찰을 사살하고, 총 16명에게 총상을 입힌 뒤 마지막 총알 한 발로 자결한다. 김상옥 의사의 나이 서른넷이었다.
영상한국사 I 169 머슴출신 산포수 의병장 홍범도의 봉기
- 홍범도는 1868년 8월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5살에 고아가 돼 머슴살이를 한 그는 결혼 후에는 함경도 북청에서 산포수로 생활했다. 홍범도는 리더십을 갖춘 명포수였다. 그는 포계(산포수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만든 조직)의 대장으로 추대됐고, 동료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힘썼다. 1895년 명성왕후 시해 이후, 홍범도는 꾸준히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당시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 등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활발히 일어나던 때였다. 홍범도가 이끄는 함경도 의병부대는 연전연승했다. 지형에 익숙하고 뛰어난 기동력을 가져 유격전을 전개하는 데 유리했다. 홍범도는 말단 병사까지 세심하게 챙기는 대장이었다. 사령관의 군복과 말단 병사의 군복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날으는’ 장군, 비장군 등으로 불린 그의 명성은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에서 자자했다. 홍범도를 찬양하고 응원하는 '날으는 홍범도'라는 노래도 있었다.
영상한국사 I 168 김상옥, 일제의 심장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다
-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 폭발 사건이 발생해, 건물 일부가 파괴되고 행인 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경찰 측은 경찰 인명피해가 없다고 밝혔다. 종로경찰서는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특별수사대를 꾸렸다. 무장항일단체 소속 김상옥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됐다. 일본 경찰은 삼엄한 경비 속에 범인 수색에 나섰다. 당시 경성에는 네 개의 경찰서가 있었다. 그중 종로경찰서는 강압 통치의 핵심이자 일제 경찰력의 본산이었다. 또 한용운, 안창호 등 독립운동가 탄압으로 악명이 높았다.
영상한국사 I 167 의열단원 김상옥, 종로경찰서를 폭파하다
- 1923년 1월 12일, 독립운동 탄압으로 악명 높았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날아든다. 닷새 후인 1월 17일, 삼판동에서 일본 경찰과 1차 총격전이 벌어졌다. 22일에는 종로구 효제동에서 1,000여 명의 일본 군경에 맞선 또 한 번의 총격전이 벌어진다. 전대미문의 총격전을 벌인 주인공은 서른네 살의 김상옥이었다. 종로경찰서는 안창호, 한용운, 이상재 등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구금하고 고문했던 악명 높은 곳이었다. 일제 강압통치의 상징이자 무자비한 고문으로 독립운동가들의 무덤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김상옥은 극심하게 독립운동을 탄압했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국민의 응어리진 분노를 터트렸다. 일제는 종로경찰서에 날아든 폭탄을 분석하고 제조의 배후로 의열단을 지목했다.
영상한국사 I 166 의열단과 상해임시정부, 다른 길을 걷다
- 의열단의 활약은 대외적으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21년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했던 김익상은 이듬해인 1922년 3월, 오성륜 등과 함께 상하이의 황포탄으로 향한다. 이들의 임무는 배편으로 황포탄에 들어올 예정인 일본육군대장 다나카 암살이었다. 다나카가 배에서 내리는 순간 세 발의 총성이 부두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총알은 다나카를 비껴갔다. 도주하던 김익상과 오성륜은 곧 체포됐지만 이 사건은 의열단의 이름과 식민지 한국의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다. 의열단의 활동이 왕성했던 1920년대,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조직은 상해임시정부였다. 3.1운동 직후 더욱 극심해진 일제의 탄압으로 임시정부는 온건노선을 걷고 있었다. 일제의 주목을 받게 된 의열단의 암살파괴 활동과 임시정부는 무관하다는 성명을 낼 정도로, 의열단과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노선은 큰 차이를 보였다. 거사에 참여한 의열단원 중 상당수는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내부적인 고민은 의열단과 김원봉의 투쟁노선에 변화를 가져온다.
영상한국사 I 165 의열단, 주요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을 암살하라
- 1921년 조선총독부에서 폭탄이 터져 수십 명의 관원들이 중경상을 입는 사건이 일어났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들어가 폭탄을 터뜨린 뒤 유유히 사라진 인물은 의열단원 김익상이었다. 의열단은 1921년 3월, 밀양폭탄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 파괴와 요인 암살을 위해 중국에서 폭탄을 반입한 것이 밀정의 고발로 발각된 것이다. 그로 인해 열다섯 명의 단원들이 검거됐다. 1919년 11월 9일, 지린성 외곽의 외딴집으로 김원봉과 그의 학교, 고향 동료들이 모였다. 밤새 회의를 한 이들은 전부터 뜻을 모아온 항일결사조직의 결성을 선언한다. 그것이 바로 1920년대 일제의 주요기관 파괴와 요인 암살로 세상을 놀라게 한 의열단의 탄생이었다. 총독부 경무국에서 장문의 조사서를 작성할 정도로, 일제는 의열단의 활동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의열단에는 오파괴 칠가살이라는 원칙이 있었다.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다섯 개의 주요 파괴 대상과 조선총독 이하 군부수뇌 등 7가지의 반민족 인사 암살 대상을 규정한 것이었다. 1920년 1차 암살파괴 활동 계획을 세운이래,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도 의열단의 의거가 줄을 이었다. 주요 표적이 된 것은 일제 탄압과 수탈의 대명사인 각급 경찰서였다. 1928년 창립 9주년 기념 선언에 따르면, 의열단은 스물 세 차례의 크고 작은 암살파괴활동을 감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