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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이주와 고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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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뉴스]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기획③ 남북 평화에 기여할 고려인들
-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을 맞아 마련한 기획보도 시간입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의 역할을 생각해봤습니다. 고려인에 대한 한국 교회의 관심은 한인 디아스포라 선교는 물론 남북 평화와 통일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최경배 기자가 전합니다. [기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의 역사는 소련 체제가 붕괴되면서 우리 사회에 제대로 알려졌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독립을 선언하고 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언어가 다른 고려인 다수가 또 다시 이주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의 역사가 알려지면서 한국 교회는 이들을 주목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각 교단과 선교단체들이 다양한 선교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고려인 강제퇴거 80주년을 맞아 지나간 역사를 되돌아보고 고려인들의 아픔을 품는 개신교계의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습니다. 종교교회와 아현교회 등이 중심이 된 북한회복감리교회연합은 미국감리교회와 함께 최근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고려인 디아스포라 80주년 평화행진’을 개최했습니다.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리고, 고려인 강제추방이 이뤄진 라스돌라야 기차역 인근 2킬로미터를 행진하고 아픈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평화행진에는 고려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미국감리교회 유레이사연회 교인들도 함께했습니다. [녹취] 허에드워드 감독 / 미국감리교회 유레시아연회 감독 “지금의 시험과 어려움을 이기고 앞으로 자유와 평화를 얻을 수 있는 변화의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또, 블라디보스톡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을 초청해 문화공연을 열어 동포애를 확인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녹취] 최이우 목사 / 북한회복감리교회연합 회장, 종교교회 담임 “여러분들의 희생과 헌신이 오늘의 대한민국의 역사를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국 교회가 고려인의 아픔을 품고 기도하는 것은 흩어진 한인 디아스포라를 통한 선교는 물론 남북의 평화와 통일에 이들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김안드레이 목사 / 미국감리교회 유레시아연회 감리사 “연해주에 북한 사람들도 많고, 우리 고려인들도 많고, 한국에서 온 사람들도 많고, 중국에서 온 조선족들이 꽤 많아요. 그러니까 한 곳에서 모였는데. 남북 통일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역할도 하고 위치에 있다고 봐요.” [인터뷰] 조경열 목사 / 북한회복감리교회연합 전 회장, 아현교회 담임 “지금까지의 교회 선교가 개체 교회 중심으로 갔는데, 이제는 교회와 교회가 연합하고, 나라와 나라가 연합하고, 가능하면 7백만의 세계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들이 다함께 연합해서 특별히 고려인 퇴거 80주년과 아울러서 한국 교회의 미래를 새롭게 설정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80년 전, 조국의 독립을 꿈꾸다 하루아침에 중앙아시아로 강제추방 당한 고려인들.. 시대가 흘러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앞당길 평화와 사랑의 존재로 주목되고 있습니다. CBS뉴스 최경배 입니다.
[CBS 뉴스]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기획② 연해주의 독립운동 역사
- 고려인 강제이주 80년을 되돌아보고 있습니다.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들의 아픔 가운데는 일제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의 역사도 담겨있습니다. 고려인들의 아픔을 되돌아보는 일은 잊혀진 역사를 바로세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최경배 기자가 전합니다. [기자] 연해주에 우리민족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 말기부텁니다. 처음엔 착취와 기근을 피한 이주였지만, 일제시대에 접어들면서 독립운동가들의 이주가 많았습니다. 특히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연해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 지금은 아파트촌으로 변한 이곳은 일제시대 한인들이 모여 살던 마을로 연해주 독립운동의 중심지였습니다. 1920년에는 일본군이 조선인을 대량학살하는 사건이 신한촌에서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인터뷰] 조영철 선교사 / 미국감리교회 유레시아연회 디렉터 "일제시대에 한국 독립을 위해서 이분들이(고려인들이) 굉장히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핍박을 당하고, 신한촌에서는 3백명이 학살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분들은 늘 한국의 독립을 위해 살았습니다." 1909년 2월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12명의 열사들이 조국 독립을 맹세하며 손가락을 잘랐던 장소도 연해주 지역으로, 연해주 크라스키노에는 단지동맹 기념비와 안중근 의사가 저격한 이토 히로부미의 죄 15조항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세워져있습니다. 또, 우스리스크에는 헤이그 특사로 알려진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을 기리는 유허비와, 독립군을 훈련시켜 함경북도에서 일본군과 싸운 독립운동가 최재영 선생의 생가가 보존돼 있습니다. 특히,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러시아 선교사로 파송된 목회자도 있었습니다. 광희문교회와 수표표교회 담임을 지낸 김영학 목사는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뒤 1922년 러시아 선교사로 자원해 독립군지원과 선교 사역을 펼치다 순교했습니다. 연해주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가들 또한 소련 정부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됐습니다. 그러나 조국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에도 이들을 품지 못했습니다. [인터뷰] 최양섭 목사 / 김영학 순교자 학회장, 대죽감리교회 담임 "친일파 사람들이 정권의 지지기반을 형성하고 있는 정권에서 독립운동한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일도 하지 않았지만 들어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죠. 그래서 고려인들이 결국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의 역사는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을 맞아 다시금 조명되고 있습니다. CBS뉴스 최경배 입니다.
[CBS뉴스]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기획① 아물지 않은 상처
- [앵커] 올해는 연해주에 거주하던 우리민족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지 80년이 되는 해입니다.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을 맞아 고려인의 아픔을 되돌아보고 한국 교회의 역할을 생각해보는 기획 보도를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첫 순서로 고려인의 역사를 돌아봤습니다. 최경배 기잡니다. [기자]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는 땅 연해주. 이곳에는 우리민족의 아픔이 스며있습니다. 연해주에 우리민족이 살게 된 것은 1864년부텁니다. 가난을 피해 농경지를 찾아 나선 조선인들이 황무지였던 땅을 개척해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1910년 한일 강제병합이 이뤄지자 우국지사들이 연해주로 건너갔습니다. [인터뷰] 최양섭 목사 / 김영학 순교자 학회장, 대죽감리교회 담임 “자유롭게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또, 탄압을 피해서 연해주 지역으로 많은 조선 사람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이 사람들의 정치적 성향은 가난 때문이 아니라 이 사람들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이곳으로 옵니다.” 그러나 당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이던 스탈린은 연해주에 정착한 고려인들을 불안 요소로 봤습니다. 접경지역에서 일본군과 내통할 것이란 의심으로 연해주 지역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것입니다. 1937년 10월, 소련 공산당은 우리민족 17만명을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맨몸으로 강제로 태워 황량한 땅에 떨궜습니다. 열차를 타고 한달동안 추위와 굶주림 속에 이동하는 과정에서 무려 1만6천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은 고려인들의 아픔은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야 우리사회에 알려졌습니다. 고려인이 강제이주 당한지 80년이 지났지만, 아직 그 상처는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고려인을 상대로 정치적 탄압은 물론 거주 이전의 자유도 허용하지 않던 소련은 체제가 붕괴되기 전인 1989년에야 강제이주를 불법적인 범죄행위로 인정했습니다. 소련 붕괴 이후 1993년 ‘러시아 고련인의 권리회복법’이 채택되면서 고려인들의 명예는 회복됐지만, 아픈 역사는 후손들에게까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인터뷰] 우노낫 / 모스크바 감리교회 "강제이주가 아니었다면 가족이 한 곳에 살 수 있었을텐데, 강제이주 때문에 가족들이 러시아의 양쪽 끝에 떨어져 살고 있습니다.” [인터뷰] 허 발레리 / 71세 "이제 조금 있으면 이렇게 기억하지 못하고 다 지나갔다고 잊어버리면 젊은 사람들은 한국어도 모르고...(잊혀지겠죠)" 역사 바로세우기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진 지금, 외세에 의해 진행된 고려인 강제이주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노력이 필요해보입니다. CBS뉴스 최경배입니다.
대한민국의 편견 그리고 고려인 4세 [고려인 강제 이주 80주년…우리 안의 고려인]
- "얼굴도 비슷하고 문화도 비슷한데 우리는 외국인이에요" "잘하면 한국인, 못하면 그냥 외국인이니까…"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은 '못 사는 나라 출신', '저학력자', '결혼이주여성' 등 갖가지 편견과 오해 그리고 차별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고려인이 H2(방문취업비자) 혹은 F4(재외동포비자)로 한국에 입국하는데 이 비자 발급도 상당히 제한적이라고 합니다. 일본이나 미국 등의 재외동포에게는 조건 없이 동포비자가 발급됩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거나 대한민국 국가 공인 기술 자격증 등을 취득해야 비자를 받을 수 있습니다. H2(방문취업비자)는 취업은 가능하지만, 최장 4년 10개월의 체류 기한이 끝나면 돌아가야 합니다. 게다가 그 취업도 노동부를 통한 정식 취업이어야 하는데 막상 현실은 정식 취업이 되지 않아 아르바이트가 아니면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고려인문화지원센터 김진영 사무국장은 "고려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불안정한 체류로 인한 불안감과 언어 문제 그리고 한국 사람들이 자신들을 외국인으로 취급하는 데 따른 위축감"이라고 말합니다. “고려인 3세나 4세 모두 다 같은 한국인이잖아요…”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고려인 1·2·3세와 4세 간 엇갈린 지위입니다. 1992년 제정된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재외동포법)'에 따르면 고려인 3세까지는 재외동포로 인정돼 동포 비자로 국내 체류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학생인 고려인 4세들은 동포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성인이 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학업이나 취업 중인 성인 고려인 4세의 경우 체류 기간 연장이 가능하지만, 학업과 취업이 종료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때문에 국내에 거주 중인 고려인 1·2·3세와 4세 가족이 이산(?)의 아픔을 겪는 상황도 발생합니다. 더불어민주당 김경협 의원은 고려인 4세 문제 해결을 위해 최근 '고려인 동포 특별법'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개정안 주요 내용은 법률상 고려인 동포 범위를 직계존비속으로 확대해 4세 이상에게도 재외동포 지위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체류 자격 취득을 지원하고 한국어·취업·기술교육을 시행해 고려인들의 국내 정착을 수월하게 하는 '고려인 동포 통합 지원 센터 건립'도 개정안 주요 내용의 하나입니다.
고려인들에게 대한민국은 어떤 의미일까요? [고려인 강제 이주 80주년…우리 안의 고려인]
- "거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지만 우리에겐 선택할 권리가 없었죠"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은 우리나라 재외동포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스탈린은 "일본 스파이가 섞여 있을 것"이라는 우려에서 연해주에 있던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 등지로 강제 이주시킵니다. 일본인 생김새가 조선인과 비슷하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당시 20만 명의 고려인들이 영문도 모른 채 강제 이주 기차에 탑승해야 했고 갑작스런 이주 정책에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죽은 이들도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혹독한 시련을 이겨내고 러시아 내 가장 성공한 소수민족으로 우뚝 섰습니다. 그 고려인들은 왜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왔을까요? 그리고 이들에게 대한민국은 어떤 의미일까요? 강제 이주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며 오랜 시간 묻어 두었던 한 민족, 같은 뿌리에 대한 그리움을 찾아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고려인들… 그들은 또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영상한국사 I 154 홍범도 등 고려인들,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하다
- 러시아에 머물며 끝까지 독립투쟁을 모색하던 홍범도는 다른 동포들과 함께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다. 영하 30도에 육박하는 겨울, 난방시설 하나 없는 기차 짐칸에 실려가야했던 고려인들은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었다. 그나마 도착한 사람들도 맨손으로 황무지를 개간해 살아야만 했다. 강제이주 당시 홍범도의 나이는 70세였다. 홍범도는 카자흐스탄 알마티 고려극장 수위로 근무했다. 당시 고려인 극작가 태장춘은 홍범도의 생애를 무대에 올리고 싶어했고, 태장춘의 권유로 홍범도가 작성한 메모가 홍범도 일지다. 1942년 중앙아시아 크즐오르다에서 연극 ‘홍범도’가 공연됐다. 이듬해인 1943년, 홍범도는 해방을 2년 앞두고 눈을 감았다.
허허벌판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됐던 고려인들 [배낭 속에 인문학] 30회 20180107
- [배낭 속에 인문학 30회] 한달동안 기차만 타고 가며 생사의 기로에 섰어야했던 고려인들 [배낭 속에 인문학 30회]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80주년 '빈 깡통의 눈물' / YTN
- 여행의 설렘과 이별의 아쉬움이 공존하는 기차역. 그중에서도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많은 사람에게 일생에 한 번 꼭 타봐야 할 ‘버킷 리스트'로 꼽힙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 열차는 낭만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가슴 아픈 역사의 산물이자, ‘고난의 행로'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고려인 1세 할머니의 증언 :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열차 화물칸에 올라탔어... 어디로 끌려가는지, 얼마나 가야 하는지…. 그곳은 마치 ‘빈 깡통' 속 같았지. 앉은 자리에서 대소변을 보고 추위에 떨며 잠을 잤어. 그러다 하루는 한 아기가 엄마 품에서 죽은 거야. 죽은 자식을 땅에 묻지도 못하고 창밖에 버려야 하는 어미의 심정이 어땠을까. 그렇게 몇 날 며칠을 계속 끌려간 거야. '빈 깡통'을 타고...] 안녕하세요? 저는 80년 전 고려인 17만여 명을 태운 '빈 깡통'입니다.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까지, 고려인이 끌려간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슬프고도 아픈 ‘회상 열차'입니다. 햇살이 내려앉은 한적한 간이역. 1937년 9월, '고려인 강제이주'가 시작된 역입니다. 옛 소련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들은 하루아침에 집과 고향을 버리고 화물 열차에 올라타야 했습니다. 열차를 타기 전, 수천 명의 독립운동가와 지식인들은 '일본의 앞잡이'라는 핑계로 총살됐습니다. 당시 고려인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해 ‘통곡의 역'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박재성 / 러시아 동포 : 지금 서 계신 이 역은 '라즈돌노예 역'이라고 하고요. 1937년도 우리 고려인이 강제이주 당할 때 제일 첫 번째 기차가 출발했던 역이 바로 이 역입니다.] [김 블라디미르 / 고려인 2세 : 제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난방도 안 돼서 한기가 가득한 화물 열차로 실려 갔다고 했습니다.] 당시 고려인의 애달픈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따금 지나는 화물 열차의 경적 소리만 빼면 평온하기만 합니다. [김동수 / 열차 탐방단원 : 80년 전에 여기 살던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를 당해서 많은 수난을 당하고, 많이 죽고 그랬는데 역사적인 길을 추적해보고 되새겨 보려고 왔습니다.] 한 사람이 지나가기도 좁은 열차 복도. 흔들리는 열차에서 밥 한 끼 챙겨 먹기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물도 없고, 화장실도 없던 깡통 열차에 비하면 이 정도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니겠지요. 악취가 진동하고 추...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