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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이주와 고려인

강제이주, 고려인 영상자료

강제이주 정책으로 흔적도 없어진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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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교육청 창의융합형 인문학기행 9일차. 어제까지 중국의 항일유적과 고구려 역사, 분단의 현실을 체험한 기행단은 오늘부터 러시아로 넘어가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즉, 연해주 일대 독립운동유적지와 고려인들의 삶을 찾는 기행을 이어간다.



8월 4일 오전 7시 이른 아침을 먹은 인문학 기행단은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는 2층 관광 버스를 타고 훈춘 시내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훈춘구안(琿春口岸-중국 훈춘과 러시아 크라스키노 사이에 있는 국경 출입 관문 겸 세관)으로 향했다. 드디어 중국 국경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로 들어가는 것이다.



연해주에 맺힌 고려인의 한과 눈물 그리고 안중근

  
















드넓은 연해주 벌판  한때는 이곳에 마을도 있고 학교도 있고 20여만의 사람들이 북적이던 한인 마을 이었을 것이다. 1937년 소련 정부의 고려인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이후 지금은 흔적도 없는 폐허로 남아있다.
▲ 드넓은 연해주 벌판  한때는 이곳에 마을도 있고 학교도 있고 20여만의 사람들이 북적이던 한인 마을 이었을 것이다. 1937년 소련 정부의 고려인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이후 지금은 흔적도 없는 폐허로 남아있다.
ⓒ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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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단은 지체되는 출입국 수속 탓에 3시간여를 기다려 중국에서 러시아로 넘어왔다. 그리고 끝없이 펼쳐지는 러시아 연해주 벌판을 1시간 정도 달려 러시아와 북한, 중국의 국경이 맞닿아 있는 크라스키노 연추 마을에 도착하였다.



이 마을은 구한말 조선에 살던 우리 선조들이 먹고 살기위해 두만강을 넘어와 정착한 땅이다. 현지 안내를 맞은 고려인 3세 남정옥 교수(전 극동연방대)의 설명에 따르면 1910년대에는 한때 20만에 육박하는 동포들이 대규모 거주지를 이루고 살았던 지역이다.



연추마을은 이웃 지신허 마을과 함께 연해주 일대의 대표적인 한인 마을이자 연해주 의병 본부가 위치하였던 곳으로 항일운동의 거점이었고 부지런한 고려인의 기상을 보여준 마을이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이후 일본의 견제와 1937년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면서 폐허가 돼버린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단지동맹비  2018년 8월 4일 충남교육청 창의융합형 인문학기행단이 러시아 크라스키노 단지동맹비에서 손을 모아 안중근 의사의 뜻을 기리고 있다.
▲ 단지동맹비  2018년 8월 4일 충남교육청 창의융합형 인문학기행단이 러시아 크라스키노 단지동맹비에서 손을 모아 안중근 의사의 뜻을 기리고 있다.
ⓒ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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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단이 러시아에서 처음 만난 것은 안중근 의사의 '단지 동맹비'이다. 안중근 의사는 1907년 10월 연해주에 도착하여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결성하였으며, 1919년 10월 하얼빈 의거를 이룰 때까지 이곳 연추에서 무장투쟁활동을 펼쳤다.



단지 동맹비는 그 뜻을 기리고자 2001년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세운 비이며,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단지동맹유지>가 새겨져 있다.

 



1909년 2월 7일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결사동지 김기용, 백규삼, 황병길, 조응순, 강순기, 강창두,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김천화 등 12인은 이곳 크라스키노(연추하리)마을에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단지동맹하다. 이들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각기 왼손 무명지를 잘라 생동하는 선혈로 대한독립이라 쓰고 대한국 만세를 삼창하다.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은 2001년 10월 18일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 이 비를 세우다.


 

이곳에서 기행단은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생애와 연해주 일대 고려인들의 한 맺힌 삶에 대하여 발제를 들었다.



천안쌍용고 한세희(1학년) 학생은 '지신허에서 보낸 한인들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삼정의 문란과 가뭄을 피해 이곳에 정착한 조선인들의 삶에 대하여 발표하였다. 한세희 학생은 "러시아의 출입금지령과 조선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정착한 선조들의 부지런함과 항일운동 역사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고 강제로 중앙아시아에 끌려가서도 살아남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잊지말자"고 말했다.



또한 대흥고 유준희(1학년) 학생은 '안중근의 독립운동, 누가 죄인인가'라는 발표를 통하여 "단지 동맹비를 바라보면서 안중근 의사의 치열한 삶과 조상들의 항일 의지를 느끼게 되었다. 이번 역사 기행을 통하여 이곳 연해주부터 시작된 항일 정신이 어떻게 하얼빈 거사로 이어졌는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만주로 간 사람들은 조선족이 되었고 연해주로 온 사람들은 고려인이 되었다

 
















포시예트에 남아있는 고려인의 흔적  1900년대 러시아속 조선이라고 불리던 포시예트에는 22개 마을에 3만여 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폐쇄된 개인 박물관 잔디밭에 그 당시 사용하던 맷돌이 남아 당시 상시 상황을 추측할 뿐이다.
▲ 포시예트에 남아있는 고려인의 흔적  1900년대 러시아속 조선이라고 불리던 포시예트에는 22개 마을에 3만여 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폐쇄된 개인 박물관 잔디밭에 그 당시 사용하던 맷돌이 남아 당시 상시 상황을 추측할 뿐이다.
ⓒ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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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도 없는 지신허 마을  (전)극동연방대 남정옥 교수가 지신허 마을 입구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 마을은 1900년대 한때 수천 명의 한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지역이었으나 소련 정부의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정책으로 없어졌다.
▲ 흔적도 없는 지신허 마을  (전)극동연방대 남정옥 교수가 지신허 마을 입구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 마을은 1900년대 한때 수천 명의 한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지역이었으나 소련 정부의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정책으로 없어졌다.
ⓒ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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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동맹비를 돌아본 기행단은 이어서 인근의 지신허 마을, 포시예트 항구 등을 돌아보았다. 남정욱 교수에 따르면 "조선인들이 인근 포시예트 항구 지역에 정착하면서 확대된 지신허 마을은 수십 리에 걸쳐 집들은 물론 학교까지 갖춘 대규모 마을이었으며, 1900년대에는 인구가 1600명을 웃돌았으며, 마을 출신의 의병활동가들이 마을에서 활동 자금과 의병을 모집하곤 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지금은 폐쇄된 포시예트 항구 인근 개인 박물관 잔디밭에 그 당시 한인들이 사용하던 맷돌 등이 남아 있을 뿐 마을은 수풀 속에 묻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대신 그들의 피와 한이 맺힌 고단한 삶은 고스란히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가 되어 지금도 남아 만주벌판과 연해주 벌판 곳곳에 흔적으로 남아있었다.



이렇게 러시아 첫 날을 보내고 숙소인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오랜 여행에 지친 아이들은 '2시간 만에 만나는 유럽'이라는 광고 카피를 기대하는 눈치였으나 필자의 뇌리에는 남정옥 교수가 던진 한 마디가 뇌리에 맴돌았다.



"그 옛날 우리 선조들이 먹고 살기 어려워 두만강을 건널때 연해주로 온 사람들은 고려인이 되었고, 만주로 간 사람들은 조선족이 되는 한 맺힌 삶을 살았지만 우리는 늘 조국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빨리 통일이 되어 이곳 연해주 벌판에 한국의 기업들이 들어와 새로운 고려인 마을이 번창하기를 기대합니다."

 












처음 만난 러시아 풍경  중국 훈춘에서 국경을 통해 러시아로 들어온 후 휴게소에 들러 빵과 음료를 사고 있다.
▲ 처음 만난 러시아 풍경  중국 훈춘에서 국경을 통해 러시아로 들어온 후 휴게소에 들러 빵과 음료를 사고 있다.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83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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