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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이주와 고려인

강제이주, 고려인 영상자료

[고려인 연재 시리즈 2] 17만 명의 값싼 인력이 중앙아시아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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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카자흐스탄의 기후를 이겨 내지 못할 것을 알고 있다. 만일 그곳으로 이주해 간다면 어린아이들은 반드시 모두 죽을 것이다."1)




연해주 수이푼 지역에 살던 박안드레이가 한 말이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이주하라는 통보를 받은 러시아 한인(고려인)들은 지역마다 모여 방안을 논했다. 예고된 이주 일정이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벼 수확을 앞둔 때였다.



러시아 당국은 보상과 새 거주지에서 받을 생활 지원을 말했지만, 고려인들은 극동 지역을 떠나 이주하는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가축 수송칸에 올라타다






1937년 8월 21일, 고려인 강제 이주 명령이 발표된다. 완료 예정일은 이듬해 1월 1일. 3개월도 되지 않은 기간 안에 수십만 명의 고려인을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옮겨야 하는 일이다. '신속한' 집행이 요구됐다. 고려인들은 일주일, 짧게는 2~3일 전에 이주 소식을 들어야 했다. 짐을 쌀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막대한 자금과 차량이 신속히 확보되어야 했으나, 불가능했다. 고려인들을 낡은 열차 가축 수송칸에 올라탔다.



중앙아시아에 도착하기까지 한 달여를 추위와 허기에 시달렸다. 식량 배급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메마른 벌판을 몇날며칠 달리던 기차가 멈추면 식량과 식수를 구하려 사람들이 내달렸다. 혹독한 환경에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정차한 틈을 타 주검을 버렸다.



지금도 못자리를 만들고 성묘하는 전통을 유지하는 고려인들이다. "우리 할아버지 목수였는데 매일 관을 만드는 일만 하셨어요. 사람들 많이 죽어서." 낯선 땅에 도착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과제였던 그때에도 관을 짜서 사람을 떠나보냈다. 자신들끼리 고려말 사투리라 부르는, 그 옛말을 쓰는 고려인들은 죽음을 가리켜 "돌아갔다"고 했다. 그런 이들이 달리는 열차에서 친지의 시신을 내버려야 했다. 잔혹했다.






















낯선 땅에서 매일 관을 짜다







"카자흐스탄은 양을 많이 기르던 나라인데, 목동이 양을 끌고 가다가 보니, 해도 안 떴는데 없던 산이 하나 있더래요. 나뭇가지로 쳐 보니 산이 움직이더래요. 사람이었던 거예요. 카자흐스탄은 추우니까. 애들 여자들 노인들을 가운데 두고, 체격 좋은 사람들이 겉을 감싸서 산이 된 거예요."




과장된 것으로 보아, 고려인들 사이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인 듯하다. 고려인들에게 중앙아시아에서의 삶이 어떤 기억으로 남았는지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야기를 들려준 이는 최멜리스 씨로, 우즈베키스탄 출신이다. 매일 관을 짰다는 목수가 그의 할아버지다.




"잔뜩 자란 갈대숲이었대요. 사람들이 어떻게 여기서 사나 걱정하다가, 갈대를 베고 또 베고. 처음에는 땅속에서 살았어요. 땅굴 파서."




땅굴이라 표현한 토굴 가옥이 당시 기록에 따르면, 5만 개였다고 한다. 러시아 고려말 신문 <레닌기치>에서 강제 이주를 다룬 기사 일부를 가져와 본다.




"시체를 관에 넣어서 매장했는데 쓸 나무도 없었다. 특히 토굴집의 습기가 어린아이들에게 죽음을 가져다주었다." (1989년 5월 3일 자 기사)




이주 초기 토굴을 파서 거주지를 마련했다. 소련 당국은 정착지에 가면 가옥과 토지가 무상으로 지급될 것이라 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 머물 집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기록을 여럿 확인한다.












풀을 삶아 먹어 연명하다






현지(공화국)에서는 이주 전담 부서까지 조직했지만, 카자흐스탄에 이주한 고려인 가구가 2만, 우즈베키스탄에는 1만 6천 가구였다. 대혼란이었다. 인터뷰한 고려인 3·4세가 전해 준 조각난 이야기들을 모으면 "4월에 풀이 나기 시작하면서 뜯어서 삶아 먹고",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연명했다.



보상과 지원이 가능하지 않은 대규모 이동이었다. 사람을 옮기는 일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다른 것은, 그러니까 그 과정에서 사라질 목숨 같은 것은 부차적인 일이었다.



앞서 언급한 <레닌기치> 기사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겨우 모든 것을 이겨 낸 사람들은 첫 콜호즈를 조직하였다."




콜호즈(kolkhoz)는 농업 집단화를 통해 만들어진 농장을 뜻한다. 황무지가 벼가 자라는 농토로 바뀌어갔다. "나뭇가지로 땅을 파서 쌀농사를 지었다." 그렇게 정착이 시작됐다. 소비에트공화국이 원한 바였다.












강제 이주당한 홍범도 장군






고려인 3·4세는 강제 이주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기억했다. 학교에서 강제 이주 역사를 가르칠 리 없었다. 가족에게서 듣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조)부모들이 힘든 이야기를 굳이 하려 하지 않았거나 말조심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주 역사를 원망하지 않고 살려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그랬어요. 만약 우리가 우즈베키스탄에 오지 않았다면 일본군에게 죽었을 거다." 진심인지 위안 삼아 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한일 합병 이후 일제는 연해주 거주 한인들에 간섭했다.



특히 항일운동을 앞장섰거나 이를 지원한 마을 사람들이 느끼는 위협은 더욱 컸다. 그중에는 홍범도 장군도 있었다. 봉오동·청산리 전투로 알려진, 항일 무장투쟁의 전설이라 불리던 홍범도 또한 37년 카자흐스탄으로 이주당한다. 그 후 고려극장 수위로 생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카자흐스탄에는 지금도 홍범도 거리(пер Хон Бен До)가 남아 있다. 그뿐이다. 남한에서도 소비에트 적군 소속이었다는 이유로 오랜 세월 공을 인정받지 못했다. 어디에서도 인정받을 수 없는 존재들. 그런 까닭에 강제 이주가 집행되던 당시에도 식민지 땅인 국내로 돌아가려는 고려인은 드물었다. 갈 곳이 없었다. 잔혹한 이주의 첫 번째 희생물이 될 만했다.






















왜, 이주당했는가






강제 이주의 이유를 흔히들 '일본인 간첩 활동 방지'라고 여긴다. 강제 이주 명령서가 공식적으로 밝힌 바이기도 하다. 일본은 연해주(극동) 지역 한인을 일본 신민이라 칭해 온 터였다.



그런데 고려인만 강제 이주된 것이 아니다. 고려인 이주가 성공(?)한 후 타탈, 체첸, 칼무크족, 독일인, 폴란드인 등 다양한 민족이 이주 대상에 올랐다. 잉여 인구를 영토 전반에 배치하려는 구상은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소련은 광활한 땅이었다.



1924년 연방 이주위원회가 창설된다. 전 영토에 걸쳐 인구, 지정학적 상황, 토지 상태 등을 조사했다. 이주 사업과 경작지 개척에 재정의 1/3 규모의 자금을 투여한다. 그만큼 사활을 건 정책이었으나 사람의 터전을 옮겨 이주시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기근과 내전(러시아 백군)이라는 방해 요소도 문제였다.



중앙아시아와 타 지역으로 이주한 러시아 주민 중 반 이상이 사업 첫해(1928년)에 원래의 거주지로 되돌아간다. 소련은 돌아갈 수 없는 이들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정착 말고는 살길이 없는 이들. 중앙아시아행 열차에 오른 고려인들은 통행증을 빼앗긴다.












값싼 노동력이 도착하다






국내 여러 연구들이 고려인 강제 이주 원인을 밝히고 있다. 진짜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이것만은 확실하다. '필요'에 의해 하루아침에 수십만 명이 터전을 잃고 이주당했다. 이때 '필요'는 그 땅에 사는/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것이 아니었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인 태알렉셰이는 시베리아 한복판을 달리는 열차에서 사람들을 향해 이리 말했다.




"정부는 전 인민이 결정한 헌법을 어기고 있다. (중략) 토지가 집단농장의 소유임을 무시하고, 집단농장을 이주시키고 있다. 고려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곳 지역에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존경받지 못하고 소수민족으로 보낼 것이다."2)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의 결정이 무시된 채 집단농장이 옮겨졌다. 고려인의 삶을 연구해온 송잔나 교수(모스크바고등경제대학교)의 저작 중 눈에 띄는 문장이 있어 가져온다.




"17만 2000명의 값싼 노동력이 중앙아시아에 도착했다."3)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이주 가능한 집단이 우선 옮겨졌다. 갈 곳 없는, 조직될 가능성 없는, 보호막 없는, 나라가 없는, 식민지 사람들이. 소련이 헌법을 개정해 '전 인민의 국가'가 되었음을 선포한 것이 1936년. 그 다음 해,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가장 힘없는 민족이 활용됐다. 민족 내 위계가 형성되고 그것이 비용으로 매겨졌다.












통행증 빼앗긴 삶 반복하나






한국에 온 지 2년 되었다는 이유지아나 씨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할머니가 강제 이주 때 연해주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왔다. 연해주에 놓고 온 재산 중 가장 아까운 것은 돼지라고 했다. 집에서 키우던 가축들.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한국에 오느라 놓고 온 것 중에 가장 아까운 것이 무엇이냐고.



유지아나 씨는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전직 의사, 변호사, 교수 이야기를 했다. 다들 고려인이다. 그녀가 일하는 영세한 공장에는 고려인이 다수라 했다. 그녀는 놓고 온 무엇 대신 그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말하는 자신도 한국에 오기 전 중국과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공부를 하고 싶었다.




"영국에서 교수 가족이 물었어요. 몇 년 뒤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고. 대답 못 했어요."




무엇이 '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앞에서 강제 이주 이야기를 들려주던 최멜리스 씨는 플루트를 전공한 음악 교사였다. 한국에 처음 와서 청소 수거 일을 했다고 한다. 한국에 온 지 10년째다.



현재 고려인들이 일할 수 있는 제조업은 중소 사업장 이하로 제한되어 있다(방문 취업 비자 H-2 허용 업종). 그러니 대부분 영세 사업장 일용직으로 일한다. 국내 고려인 67%가 단순노무직에 종사한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2014년 국내 거주 고려인 동포 실태 조사).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들이 연해주에 두고 온 것은 단지 농지와 가축이 아니었다. 한인 학교, 잡지와 언론사, 자치·정치 조직…. 단지 살아간다는 것 이상의 의미들이었다. 연해주에 정착하고 50년 동안 가꾼 삶의 터전, 아니 그 삶을 가져오지 못했다.



유지아나 씨는 한국에 자신의 삶을 가져왔을까. 80년 전 강제 이주 열차에 올라탄 고려인들은 통행증을 빼앗겼다. 자유로이 이동할 수 없게 됐다. 그곳에서 미개척지를 일구며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 주어진다.



선조들 땅에 와서, 변두리 공단 도시로 삶을 이주한 그녀는 한국 사회에서 통행증을 가진 존재일까.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낯선 땅에 도착한 조부모와 유지아나 씨가 자꾸만 겹쳐 보인다.



다음 편에서는 강제 이주 후 중앙아시아에 정착해 온 고려인들의 삶을 보려 한다. 강인한 성취이자 다시금 무너질 토대였다. 고려인 3·4세가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이기도 하다.



 



출처 :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23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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