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연재 시리즈 1] "할머니의 어머니는 왜 러시아로 갔나요?"
컨텐츠관리
view : 1206
"우리 할머니한테 들은 이야기인데…"라며 입을 뗀다.
이름이 예브게니라 했다. 인터뷰 시작 전, 내 쪽에서 물었다. "오늘 무엇을 물을 거라 예상하나요?" 예브게니의 성은 김 씨라고 했다. 김예브게니가 답한다.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요." 예전에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어릴 때 한 것이라 매체도, 내용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보이는 관심은 할머니(할아버지) 이야기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17살, 고려인 3세다. 초등학교 때 한국에 와서 지금은 안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러시아 국경을 넘은 첫 세대의 이주가 1860년대로 추정되니 이들의 후손이 한국에 돌아온 것은 150년 만이다. 3~4세대를 거쳤다.
부모를 따라 한국에 온 고려인 청소년의 경우, 국사 수업 시간에 '고려인'을 배우게 된다. 재외 동포를 설명하는 가운데 짤막하게 소개될 뿐이지만.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국경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 등지로 이동한 이들과 그 후손을 고려인이라 한다.
교사들은 묻는다. 러시아나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온 학생을 향해서다.
"몇 세니?"
"4세(3세)요."
답을 하나 대화는 이어지지 않는다. 간혹 "할아버지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니?" 정도의 물음이 덧붙기도 한다. 더 오갈 대화는 없다. 상호 간에 질문이 오고 가려면 작을지라도 관심이 필요하다. 정보가 필요하다. 호기심일지라도 관심은 나와 '관계된' 대상이라야 만들어진다. 한국 사회에서 고려인은 '우리'와 '관계된' 존재일까.
그 관계라는 것을 만들어 볼까 하여 물었다. 교실에서의 질문처럼 뻔했다.
"조상들이 왜 러시아로 갔나요?"
인터뷰에 동석한 어떤 이가 지적한다. "조상, 선조 같은 단어는 피하는 게 좋아요." 상대가 알아듣기 힘든 단어라는 소리다. 한국말이 서툴다. 고려인들은 주로 러시아 말을 쓴다.
고쳐 다시 묻는다.
"할머니의 어머니는 왜 러시아로 갔나요?"
"왜 갔나요?" 뻔한 질문을 하다 |
러시아 애칭으로는 제냐, 김예브게니가 말한다.
"할머니 엄마가 조선에서 독립운동을 했어요. 일본군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 같이 싸웠어요. 싸움에서 졌고 러시아로 도망쳤어요. 호수? 강 같은 것이 있어서, 그 길을 건너 러시아까지 걸어갔어요."
아마 '두만강'을 가리키는 것일 게다. 많은 고려인들이 두만강을 넘었다. 첫 세대는 '생존'이 이유였다. 이주 기록이 최초로 문헌에 담긴 1863년 이전에도 국경을 넘는 일은 빈번했다. 봄에 몰래 연해주로 가, 주인 없는 땅에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 돌아오곤 했다(계절 출가). 국사 교과서를 펴면 수탈과 세도정치가 나오는 그 시절이었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
대흉년이 들자 마을 전체가 이주를 시도하기까지 한다. 수만 명으로 불어난 러시아 땅 조선인들은 지신허(남우스리스크 포시예트)에 정착한다. 고종 폐위 이후 항일 의병이 대거 연해주로 이동하는 등 일본의 압제를 피해 국경을 넘는 이들도 늘어간다. 예브게니가 들려준 일본군과 싸운 할머니 이야기가 여기 속하겠다.
"할머니의 엄마는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걸어가서 살게 됐고. 다시 하바롭스크까지 갔어요. 거기에 고려인 사람들 많이 계셨어요."
기록에 따르면, 초기 한인 마을인 개척리(블라디보스토크 포그라니치나야)는 수십 리에 걸쳐 집들이 늘어섰다고 한다. 초가집과 조선어 간판은 흔했다. 1890년대 말 시행된 러시아제국의 인구 조사는 조선말 하는 사람을 2만 6000명이라 밝혔다. 1900년대 초에 이미 연해주 한인(고려인) 마을만 32개였다.
규모 있는 마을들은 저마다 자치 공간을 형성하려 애썼고, 색중청과 같은 한인 자치 기구를 조직해 마을 내에서 자율적으로 임원을 뽑아 분쟁과 시비를 가리는 등 치안 활동과 관혼 상제 등을 챙겼다.
개척리 과거 모습. |
연해주는 고려인들에게 생존 문제에서만 '희망의 땅'이 아니었다. 당시 10월 혁명과 내전으로 러시아는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러시아로 이주한 이들은 문화를 지키면서도 세계 흐름과 함께 움직였다. 볼셰비키과 연대해 러시아 내전(적백 내전)에 참여하기도, 권리 향상에 영향 받아 각지에서 민족인민위원회 한인(고려인)분과 설립을 꾀하기도 한다.
조선에서 만세 시위가 있던 해(1919년)에 연해주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열린다. 그 다음해 독립문을 본뜬 기념비가 신한촌에 세워진다. 1908년 <해조신문>을 시작으로 한글신문이 발행되고, 1917년 이전까지 45개 정도였던 한인 초급학교는 20년 뒤에는 287개로 증가해, 학생만 2만여 명이라 했다. 이를 고려할 때 당시 국내(조선)보다 문맹률이 낮으리라 추측되는, 연해주는 그런 땅이었다.
보석 상자와 고려 사투리 |
그러나 내 앞에 앉은 고려인 4세는 할머니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데 애를 먹는다. 한국말이 서툰 데다 역사책에나 나올 단어들로 가득한 선조들 역사를 전하는 일은 어렵다.
"일본군이 잡으러 왔고, (증조할머니의) 남편은 잡혀가기 전에 할머니의 엄마에게 보석 상자를 주었어요. 그것을 가지고 도망쳤어요."
증조할아버지가 생사를 오가는 순간에 증조할머니에게 건넸다는 '폐물함'은 '보석 상자'가 된다. 폐물함이라는 단어는 낯설다. 이야기는 순간 보석 상자를 주고받는 연인들의 낭만으로 둔갑한다.
그가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는 이 정도다. 증조할아버지가 겪은 위기는 1918년 러시아 내전을 틈타 연합국 소속으로 러시아에 상륙한 일본군의 탄압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몇 대를 거쳐 구전된 이야기는 사라지고 지워진다.
한곳에 정착할 수 없었던 고려인의 역사는 언어마저 갈라놓았다.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고려인 3~4세가 '고려 사투리'밖에 할 줄 모르는 조부모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어떻게 대화를 나누느냐고 물으니, 할머니가 한국말로 하면 자신은 러시아어로 답한다고 한다.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
어렵게 들은 옛이야기를 고려인들은 한국에 와 다시금 전한다. 자꾸만 이들에게 "누구냐"고 묻기 때문이다.
"우리 할아버지 훌륭한 사람이에요? 무슨 일 때문에 할아버지 그렇게 됐어요? 어릴 때 자주 물었어요." 항일 의병장이었던 고조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내던 이는 한국에 와서 "고려인이면 고려 시대 살았던 조상이냐?"고 물음당한다. 때로는 우즈베키스탄 결혼 이주 여성으로, 조선족으로, 아니 그냥 외국인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이들은 반복해 자신의 뿌리를 보여 준다. 부모의 부모를 거슬러 올라가 자신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사라진 증거(족보, 공문서 등)가 아쉽고, 마음처럼 안되는 의사소통이 답답하다. 김예브게니도 단어를 고치고 고치다가 중얼거린다.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요."
한국에 와서야 한국어를 배웠다. 드디어 할머니와 손자가 같은 말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비행기로 반나절 이상을 가야 하는 곳에 떨어져 있다. 그의 할머니는 우즈베키스탄에. 그는 이곳 안산, 고려인들이 모여 사는 안산 땟골마을(선부동)에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초기 정착 사진. |
도돌이표로 돌아오다 |
고려인 역사는 이주의 세월이라 해도 무방하다. 한 세대가 한 지역에서 평생을 보낸 일 자체가 드물다. 1세대는 조선에서 태어나 러시아 연해주로, 2세대는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떠나야 했다(강제 이주). 그곳에서 일궈 낸 삶은 소련 붕괴 이후 흔들렸다. 고려인 3~4세대는 옛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혼란을 뒤로하고 또다시 봇짐을 싼다. 러시아를 비롯해 각지로 흩어졌다. 그러는 사이 언어도 흩어졌다.
2000년 이후 고려인 15만 명이 중앙아시아 국가를 떠났다고 한다(2002년 전 러시아 인구조사, 러 통계청 발표). 이 중 한국에 들어온 이는 4만여 명. 누군가는 '돌아왔다'고 했다.
"연해주에서 할머니가 태어난 거잖아요. 어머니와 아버지는 (중앙아시아에서) 연해주로 다시 온 거고, 지금은 먼 조상의 나라 한국으로 오게 된 거예요. 다시 돌아왔어요. 멀리 돌아왔어요. 4세대를 거쳐서."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고려인의 역사는 어쩐지 도돌이표 같다.
"할머니는 한국을 조선 땅이라 했어요. 고향이라고 자주 말씀하셨어요."
천따찌야나는 자생적으로 고려인 마을이 형성된 안산 땟골을 보며 어릴 때 자란 마을과 비슷하다고 했다. 마을 이름조차 '우즈베키스탄'이었다. 한국으로 온 지는 9년째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연해주에서 나고 자랐다. 그러다 강제 이주 열차를 타고 우즈베키스탄으로 갔다.
한국에 온 뒤 버스나 거리에서 보는 할머니들에게서 우즈베키스탄에 살고 있는 친할머니를 떠올린다고 했다. "닮았어요." 할머니 무릎에서 '조선 땅' 이야기를 들었다.
"어릴 때라 옛날이야기처럼 들었어요. 재밌다."
그녀가 한국에 온 뒤로 더 이상 그것은 옛날이야기가 아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계속 생각해요." 낯선 땅에서 낯선 언어로 헤쳐 나가야 하는 일이 세대를 이어 반복된다. 황무지와 같은 땅에 생존을 위해 뿌리내린다. 그 뿌리는 자주 파헤쳐져 늘 현재진행형이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무것도 없이 와서 자기 인생을 만들었으니까. 그 이야기들 한국에서 살 때 (떠올리면) 큰 힘이었어요. 저도 한국에 와서 모든 걸 할 수 있고, 해야 해서. 그런 생각으로 비교를 했어요."
모든 것을 할 수 있어야 했다. 대부분 저임금 일터에서 이뤄지는 일이다. 젊은 시절 "평생을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아갈 것이라" 믿었던 인생은 사라지고 따찌야나는 말이 통하지 않은 공단 한편에서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지금은 한국어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러시아어 간판으로 빼곡한 땟골이지만, 한때는 반월 공단으로 들어가는 일용직 한국인 노동자들의 주 거주지였다. 오래된 다세대주택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동네의 특징은 저렴한 주거비다. 그 특징으로 각국 이주 노동자들이 이 마을을 거쳐 갔다. 정확히는 저렴한 노동 인력들이 머물다 갔다.
그 자리에 고려인이 하나둘 자리 잡기 시작했다. 재외동포 비자가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에 열린 2007년 이후다. 그녀는 이제 이곳이 '고향'이라고 한다. 하지만 말하는 내내 소련, 우즈베키스탄, 한국을 가리키며 '고향'이라는 단어를 붙였다.
다른 누군가가 그랬다. "고향이 여러 개라는 것은 사실은 없다는 말과 같잖아요." 그래서 슬픈 것이다.
혼신을 다해 고향이라 생각해야 |
그럼에도 따찌야나가 사용하는 '고향'이라는 단어에는 역사가 있다.
"우리 할아버지 자주 이런 말 하셨어요. 살고 있는 곳을 좋아해야 한다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살고 있는 곳이 고향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혼신을 다해서 살아야 한다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던 '생존'이 주는 교훈이었을지도. 연해주와 전혀 다른 기후와 풍토에 새로이 적응을 해야 했던 '사할린 강제 이주' 후 깊게 각인된 교훈일지 모른다.
할아버지가 준 가르침을 이제는 한국에서 사는 자녀들에게 전한다고 하지만, 고려인 공동체를 떠나 한 걸음만 세상 밖으로 나가도 현실과 만난다.
"우리 한국인처럼 살 수 있는 곳이 없잖아요."
고려인의 역사는 그 지점을 시험받아 왔다. 이들을 한국인, 아니 '그 자신'으로 살 수 없게 한다. 너는 누구냐고 묻지만 뿌리를 훑어 보여주는 이들의 이야기를 한국 사회는 듣지 않는다. '고려인 4세'라는 답변 외엔 관심 없는 교실과 같은 사회 속에서, 이들은 늘 "내가 누구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으며 산다. 정체성을 머리에 이고 산다. 그래서 고려인의 이주경로를 좇는다는 것은 이들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 된다.
다음 글에서는 삶의 교훈을 깊게 각인시켰던 '강제 이주'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자 한다. 고려인들이 연해주에 터전을 잡은 지 50년, 자치주 건설을 청원하기 시작한 지 15년이 지난 해의 일이다. '그 자신'으로 살고자 했던 노력의 세월과 같다.
출처 :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23063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