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덮인 벌판 '우슈토베'… 맨손으로 땅 일군 고려인의 넋이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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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최초 정착지를 가다]
1937년, 연해주의 17만명 고려인 우슈토베 등 10곳으로 강제 이주
폭압적인 과정에 2만여명 사망
하늘이 땅에 닿은 곳까지 온통 하얀 눈이었다. 광활한 대지란 말이 실감났다. 카자흐스탄 동남부 우슈토베로 가는 길. 옛 수도인 제1도시 알마티에서 자동차로 4시간 달렸다. 일부 구간 차도에 눈이 쌓여 중앙 차선이 잘 보이지 않았다.
우슈토베는 1937년 10월 연해주에서 살던 '카레이츠(고려인)'가 강제로 이주해 처음 발을 디딘 땅이다. 추울 땐 영하 40도까지 내려간다. 연해주 고려인 17만명은 막 겨울이 시작될 무렵 이곳을 비롯해 인근 우즈베키스탄 등 10여 마을로 이주했다. 소련 지도자 스탈린은 연해주 카레이츠를 잠재적 일본 첩자로 여겼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켜 긴장이 고조된 때였다. 폭압적 이주 과정에서 2만여 명이 사망했다.
지난 18일 우슈토베엔 연신 눈발이 흩날렸다. 쌓인 눈에 발목이 빠졌다. 통일문화연구원 중앙아시아 지부장으로 카자흐스탄 고려인에게 한글 교육 등을 하고 있는 이재완 중앙아시아 통일과나눔아카데미 원장이 현지를 안내했다.
우슈토베 마을 바슈토베 언덕 아래 고려인 묘역이 있다. 무덤 약 200여 기가 모여 있다. 이런 묘역이 마을 5곳에 있다고 한다. 초기 무덤은 많이 사라졌다. 묘비에는 대부분 러시아 문자로 이름이 적혀 있다. 가장 앞쪽 두 기의 얕은 봉분에서 한글로 적은 묘표(墓表)를 발견했다. 녹슨 철 묘표에 서툴게 한글을 새겼다. 오른쪽 묘에는 '조응선 묘. 1871-1951'이라고 적혀 있다. 사망일을 8월 15일로 적었다. 왼쪽에는 '조수만 묘 1905-1951'이라 적은 묘표가 보인다. 사망일은 8월 10일. 불과 닷새 차이다. 아들이 먼저 죽자 이를 괴로워한 아버지가 곧이어 세상을 떠난 것일까. 1937년 당시 서른두 살 아들과 예순여섯 살 아버지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6500㎞ 떨어진 이 낯선 땅에 도착했을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후 이곳에서 15년간 고락을 함께하다 거의 동시에 삶을 마쳤다.
이주 당시를 기억하는 1세대 고려인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2세대인 70~80대 노인 중에도 우리말을 하는 이들이 드물다. 그래도 당시 겪었던 고통의 기억은 후대로 이어지고 있다. 박 일리야(79)씨는 "이주 첫해 많은 사람이 얼어 죽었다. 도구가 없어 맨손으로 땅을 파서 토굴을 만들어 살았다"고 전했다. 포수였던 아버지는 일리야씨가 두 살 때인 1942년 소련 군대에 입대한 후 돌아오지 못했다. 어머니 혼자 3남1녀를 키웠다. 고려인들은 이주 당시 숨겨온 볍씨를 이듬해 봄부터 심어 벼농사를 시작했다 한다.
허 에브다니아(81)씨는 강제 이주 이듬해 태어났다. 그녀는 아버지한테 들은 얘기를 들려줬다. 아버지는 스물다섯 살 때 이곳에 도착했다. 어두운 밤 기차에서 내렸는데 날이 밝으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벌판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3·1운동 직후 연해주로 피신했다가 이곳으로 끌려왔다. 외할아버지도 3·1운동에 참여한 '혁명가'였다.
카자흐스탄에 사는 고려인은 현재 약 10만1000명. 전체 인구 1800만명 중 0.6%에 불과하다. 하지만 고려인은 카자흐스탄 상원 의원 1명, 하원 의원 1명을 비롯해 사업가·의사·학자·공무원 등 이 나라에서 주요 역할을 하고 있다. 한글판 고려일보, 민족 공연을 하는 고려극장 등을 운영하며 정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슈토베 고려인협회 리 브라디미르 회장은 "130개 부족으로 이뤄진 카자흐스탄에는 주요 부족 셋을 '3대 주즈'라고 하는데 고려인은 인구는 적지만 '네 번째 주즈'로 불린다"면서 "고려인은 근면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고려인이란…]
'고려인'은 중앙아시아 교민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이다. 1860~70년대 연해주로 건너간 조선인들은 러시아인들에게 스스로를 '가우리(kauli)'라고 했다. 가우리는 고구려(고려)를 뜻한다. 연해주가 과거 고구려의 땅이었음을 과시하는 말이었다. 연해주 한인들은 1919년 조선 독립을 위해 조직한 '고려인동맹' 등에서도 고려인이라는 표현을 썼다. '조선인'이란 말도 함께 쓰였으나 남북 분단 후 '고려인'이 굳어졌다. '조선인(북한)'도 '한국인(남한)'도 아닌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27/201902270006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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