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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이주와 고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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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소련 한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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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ㅣ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사)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 나지미의 타쉬켄트국립사범대 한인 학생들.


1922년 시베리아를 강점했던 일본군이 철수하자 산중에 들어가 항일 빨치산 투쟁을 벌였던 한인들은 평지로 내려와 일상으로 돌아왔다. 소련 정부는 1930년대 초까지 소수민족들의 자치와 언어, 관습, 풍습을 장려하는 문화정책을 썼다. 한인사회는 안정을 되찾고, 민족교육 사업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17년 혁명 이전 극동지역에 45~50개를 넘지 않던 한인 초급학교가 1930년대 중반에는 287개로 증가되었다. 학생 수도 2만 1956명이나 되었다. 혁명 전에는 한인 중등학교가 하나도 없었으나 1930년대 중반에는 3개의 중등학교와 49개의 초급중등학교에서 6천명이 넘는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었다. 1924년에는 우수리스크에 한인학교 교사들을 배출하기 위해 고려사범전문대학이 설립되었다. 1931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고려사범대학이 설립되었고, 780명의 학생들이 공부하였다.



한인들이 일본에 적대적이고 소비에트 정권에 우호적이었으며, 1918~1922년 내전시기 극동에서 일본군 등 간섭군 및 백군과의 빨치산 투쟁에서 한인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지를 소련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극동소비에트 제1연대 지휘관으로 극동지역에서 빨치산 투쟁을 이끌었던 니콜라이 일류호프(Н. Ильюхов)는 1928년 레닌그라드에서 발행한 자신의 저서 ‘1918~1920년 연해주에서의 빨치산 활동’에서 한인 빨치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우리는 한인들이 규율을 어기거나 명령을 수행하지 않거나 또는 -이보다는 단순한 일이지만- 술에 취한 경우를 알지 못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은 전형적인 적군 투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7년 극동의 한인사회 전체에 대해 집단이주를 단행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이유가 이야기된다.














   
▲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들(1900년대 초).



신생 혁명국가 소련의 취약성



1917년 볼세비키 혁명으로 소련정권이 수립되었을 때 소련은 제1차 세계대전에 휘말려 있었다. 사회주의 국가건설에 매진하기 위해 세계대전에서 발을 빼고자 소련은 독일과 휴전을 추진했다. 독일은 휴전조건으로 러시아 지배하의 우크라이나, 발트 연안 3국, 폴란드의 독립을 요구했다. 러시아로서는 굴욕적인 조건이었다. 레닌은 내부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조건을 받아들여 휴전을 성립시켰다. 취약한 소비에트를 지키고자 한 고육책이었다.



극동에서도 시베리아를 강점하고 있는 일본, 미국, 영국, 캐나다 등 국제 간섭군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 연해주는 물론 캄차카와 북사할린 등 동시베리아 전역을 관할하는 완충국가로서 극동공화국을 수립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게 했다. 극동공화국은 1922년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해체하고 나서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으로 복귀하였다. 신생 소련의 취약성과 절박한 위기의식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혁명 후 소련정부가 ‘국유화와 집단화를 통한 산업화’ 정책을 추진하자 민중들이 광범하게 반발하여 1918~1920년 기간 중에 내전상태에 빠져들었다. 제1차 대전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소련은 내전까지 겪어 피폐할 대로 피폐해졌다.



내전을 가까스로 수습한 혁명정부는 국유화와 집단화의 전면적인 시행을 일단 유보하고, 사유재산, 사기업과 자영업 등을 인정하는 신경제정책(NEP)을 시행했다. 그러자 부농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곡물가격을 올리는 등 폐해가 나타났다. 거기다가 신생 공산주의 국가로서 소련은 자본주의 국가들에 포위되어 절박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1929년 자본주의 중심국 미국에서 대공황이 일어났다. 스탈린은 그 기회에 ‘우리는 오랜 러시아적‘ 낙후성을 뒤로 하고 ’산업화-사회주의‘의 길로 전략을 다하여 나아갈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신경제정책 포기, 부농과 자영업자들의 재산 몰수, 산업화를 통해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전쟁에 대비하는 정책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은 ’인민의 적‘으로 선포했다. 소련정부는 인민들에게 공포감을 유발시켜 반발을 차단하고, 자본주의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소비에트 국가를 수호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부추기고, 간첩, 소수민족의 위험성을 과대 선전했다.



한인에 대한 의구심과 경계



1922년 10월 4년간 시베리아를 점거하고 있던 일본군이 물러가자 연해주 한인사회 지도자 한명세는 한민족 자치행정구역 설립을 청원했다. 그러나 1922년 12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사무국은 한인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모든 한인들은 연해주에서 국외 또는 아무르 지역과 자바이칼 지역으로 이주시켜야만 한다. 극동 사무국의 이유는, 한인들을 통하여 일본의 영향력이 변경지역으로 확대된다는 것이다. 이후로 어떠한 것이든 자치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금한다.”



이 결정의 이면에는 연해주 한인에 대해 ‘자국민’이라 주장하며 간섭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일본과 피부색과 모습이 유사한 한인에 대한 의구심과 경계심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 후 193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거의 매년 한인들을 부분적으로라도 이주시키자는 논의가 계속되었다. 1928년에는 수천 명의 한인들을 아무르강 하류지역과 하바롭스크주 북부지역으로 집단이주했다.














   
▲ 우즈베키스탄의 한인 농부들.


중앙아시아 개발에 활용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집단이주된 것은 중앙아시아 지역은 극동지역에 비해 수십 배나 커서 한인들을 분산시킬 수 있고, 그 곳 주민 수백만명이 소련의 전면적인 집단화 과정에서 죽고, 수십만명이 국외로 떠난 데다, 1931~1933년 전염병 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 중앙아시아가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자흐스탄의 경우 면적이 2,724,900㎢로서 한반도보다 12배가 큰 땅에 인구가 약 2백만명밖에 안 되었다. 또한 그곳은 유럽이나 극동에서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적과의 내통 등에 신경을 덜 쓸 수 있는 지역이었다. 소련 당국은 이후 폴란드인, 독일인, 타타르인, 체첸인, 칼므이크인 등 소수민족을 대부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다.



소련 당국은 1920년대 초부터 카자흐스탄 지역에 쌀농사의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연해주 한인을 초청하고, 한인 70가구로서 시범농장을 조성하여 벼농사를 전파하도록 했던 것을 보면 한인들을 중앙아시아 개발의 도구로 사용할 계획을 일찍부터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파시스트 국가들과의 전쟁위기



1936년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이 우호조약을 맺으면서 소련은 유럽지역에서는 독일과, 극동지역에서는 일본과 양면에 전선이 형성될 위기에 직면했다. 아직 국력을 충실하게 갖추지 못한 소련은 일본보다 훨씬 강한 독일 나치즘 쪽에 대비를 집중하면서 극동에 전선이 형성되는 것을 피할 안정책으로 극동지역 한인 전체를 강제이주할 계획을 추진했다. 1937년 일본은 중일전쟁을 도발하여 시베리아 침공의 여력이 없었다. 그런 일본에 대해 소련은 한인들의 강제이주로 한편에서는 일본의 간섭을 사전에 차단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과 전쟁할 의사가 없음을 보이고자 하였다. 또한 소련은 1937년 8월 21일 중국 국민당과도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다른 한편 소련은 자국의 군대를 양성하고, 유럽지역에 있는 군수공장들을 안전한 시베리아지역으로 이전시키며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추진했다. 독소불가침조약은 1939년에 체결되었다. 이 모든 것이 전쟁에 대비할 시간을 벌어 극동지역을 안정시켜 유럽의 위협에 집중 대비하고자 한 것이었다.














   
▲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7차 소비에트 연방회의에 참석한 극동 러시아 대표 미하일 김. 조셉 스탈린 앞에 앉아 있고 그의 옆이 몰로토프이다.


한인 강제이주



1937년 8월 24일자로 극동지역 인민위원회 위원장인 루쉬코프은 내무인민위원 예좁(Ежов)로부터 1937년 8월 21일자의 스탈린과 몰로토프의 명령서와, 10개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담은 명령서를 받았다. 스탈린 정부는 국경지대의 한인들만을 이주시키기로 했던 초기의 결정을 번복하고 북사할린, 캄차카, 오오츠크 등에 얼마 되지 않는 한인들까지 극동지역 거주 한인 전부를 이주시키기로 하였다.



스탈린과 몰로토프의 명령이 내려온 지 열흘만인 9월 1일부터 강제이주가 시작되었다. 그 과정에서 소련 극동지역 공산당 간부들에 의해 한인들에 대한 일본 간첩의 위험성이 극도로 부풀려져서 올라갔다. 예좁은 1937년 9월 21일자로 제1차 한인이주가 완료되었으며, 9월 24일부터 제2차 이주가 시작된다고 스탈린에게 보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해안과 요새지대 주변 또는 근처(블라디보스토크, 쇼코토바, 수찬, 올가, 솝가반)에 분포되어 있는 한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일본 간첩행위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극동의 경계지역에 남아있는 모든 한일들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해 10월 25일까지 두 달 반 동안 총 3만 6442가구 17만 1781명이 124개의 집단수송열차에 실려 우즈베키스탄공화국에 1만 6272가구 7만 6525명, 카자흐스탄공화국에 2만 170가구 9만 5256명이 배치되었다.



한인강제이주 상황을 완료되는 대로 예좁에게 보고한 실무책임자들(루쉬코프, 체르느이쉐프, 쏘콜로프)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통계표를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실무책임자들이 10월 14일까지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열차로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으로 출발시켰다는 한인이 22만 5424명이 된다. 그런데 최종 도착인원으로 예좁이 스탈린에게 보고한 인원은 17만 1781명이었다. 5만 3643명이나 차이가 난다. 이 차이가 단순한 통계상의 집계착오인지 이주과정에서 처형, 병사 등 사망한 인원인지 알 수 없다. 한인강제이주 실무를 주도했던 인물 중의 하나인 극동지역 인민위원회 위원장 루쉬코프는 목숨에 위협을 느끼고 1938년 6월 일본으로 달아난다.



 



원문 : http://www.ok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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