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 봉오동 전투의 영웅 <역덕이슈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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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덕이슈 오늘, 봉오동 전투! 1920년 6월 7일, 홍범도 장군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다! 독립운동사에서 빛나는 승리로 기억되는 두 전투가 있습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입니다.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 장군, 청산리 대첩은 김좌진 장군으로 기억됩니다. 홍범도 장군에 대해서는 이름 외에 아는 것이 많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포수였던 홍범도는 동료 포수들을 규합,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거합니다. 1907년 고종 퇴위와 군대 해산으로 정미의병이 일어나고,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해 포수들의 무기를 압수하려고 하자, 홍범도는 동료 산포수들을 모아 다시 궐기했습니다.
1908년 일제의 토벌을 피해 연해주 지역으로 망명한 홍범도, 그는 1919년 대한독립군을 창설해 국내진공작전을 펼쳤고, 압록강 연안의 혜산진을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간도와 연해주에서의 무장항쟁이 거세지자 일본군은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공격합니다.
1920년 6월 7일,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일본군을 길림성 왕창현의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해 공격합니다. 독립군 연합부대의 대승이었습니다. 홍범도와 대한독립군은 이후 청산리 전투에도 참가해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청산리 대첩 후 거세지는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홍범도와 독립군은 소련 자유시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1921년 6월, 항일무장투쟁 역사상 최악의 비극으로 불리는 자유시 참변을 겪습니다. 이 사건으로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군들은 뿔뿔이 흩어지거나 무장 해제를 당합니다. 홍범도는 소련에 남아 한인들의 권익옹호, 민족의식 고취에 매진했습니다. 나이 70세인 1937년, 홍범도는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합니다. 한반도와 만주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던 독립운동의 영웅 홍범도 장군은 카자흐스탄의 고려극장에서 창고지기를 하며 여생을 마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