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봉오동전승기념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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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나스]2011.6.7
봉오동전투 승전 91주년 맞아
written by. 최경선
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 기념행사와 학술회의를 열어
1920년 6월 6∼7일, 중국 화룡현 봉오동 골짜기에서 대한북로독군부소속 독립군부대가 일본군 대대병력을 섬멸시켰다. 이른바 봉오동전투다.
‘독립전쟁의 제1회전(會戰)’으로 불리는 이 전투로 인해 독립군은 독립운동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이어진 노두구전투와 청산리대첩도 이같은 자신감에서 가능했다.
봉오동전투 전승 91주년을 맞아 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이사장 이종찬 前 국정원장)는 7일 오후 2시 서울 종로 우당기념관에서 기념행사와 학술회의를 열었다.
▲ 7일 오후 2시 서울 종로 우당기념관에서 열린 봉오동전투 전승 91주년 기념행사에서 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 이종찬 이사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konas.net
항일 무장독립운동의 거목이었던 여천(汝千)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장군은 전설적인 봉오동 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주역임에도 청산리 전투의 주인공인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 등 다른 지도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평양에서 출생한 장군은 오동진, 계연수 장군 등과 함께 배달민족의 역사서인 '한단고기'를 편찬했으며, 1919년 51세에 대한독립군을 창설해 총사령관으로 취임해 만주에서 일본군에 대한 최초의 승전인 봉오동 대첩을 달성하고 청산리전투에도 참전했다.
이후 러시아로부터 조선독립자금을 지원받아 독립운동을 계속했고 동포를 위한 협동농장을 주도하면서 농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해 그곳 크즐오르다 극장에서 수위로 근무하는 등 비운의 나날을 보내다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43년 7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 날 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 이종찬 이사장은 기념사에서, 봉오동전투가 치러졌던 지역은 저수지에 수몰되었고, 홍범도 장군의 시신이 아직도 카자흐스탄에 머물러 있는 현실을 개탄했다.
이어 “돈이 많다고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며, 도덕성이 정립되지 않으면 선진국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하고 “홍범도 장군 같은 선진들이 부족한 장비와 무기로 어떻게 싸웠는지 배우고 가슴에 새겨야 우리의 현대사가 정리되고 강군 육성도 가능하다”며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분들의 애국정신을 후손들이 기릴 것을 재차 강조했다.
이어서 진행된 학술회의에서 동북아역사재단 장세윤 연구원은 봉오동전투가 “한민족의 무장투쟁 역량을 뿌리째 뽑겠다고 북간도 지역에 불법으로 침입한 일본군 대부대 포위작전을 파탄시켜, 간도와 연해주 일대의 독립운동 역량을 보위하고 추후 각종 민족운동의 고양에 크게 공헌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의의를 설명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잠적한 독립군을 찾아낸다는 명목으로 작전을 자행하면서 간도참변이 시작됐고 이로 인해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간도지역이 철저히 초토화됨으로써 독립운동 세력이 재기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일본군의 잔학행위에 대한 중국인들의 반일시위가 확산돼 한·중 양민족이 연대하는 계기가 됐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봉오동·청산리전투’가 과장된 신화나 일방적 무용담이 아닌 각고의 노력과 피땀의 결과로 어렵게 쟁취한 ‘장기적 독립전쟁의 일환으로서의 승전’이라는 의미를 후세들에게 올바르게 교육하고, 남북한(학계)에서 대단히 이질적인 개념과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독립운동이나 독립군 관련 용어, 개념도 활발한 교류와 토론을 통해 이견을 해소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konas)
코나스 최경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