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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홍범도의 무력부대 행동에 관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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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비 : 문정 제70



대정9(1920) 1122일 재 간도(間島) 일본 총영사관



김좌진 및 홍범도의 무력부대의 행동에 관한 건



군정서와 관계있는 유력한 첩자의 보고 요지는 다음과 같다.



(본 정보는 주로 첩자가 1114일 황구령를 출발하여 청산리를 거쳐 화룡현 삼도구 大金廠에 온 군정서 중대장 吳尙世에게 얻은 것이다.)



 



1. 김좌진의 부대



1) 김좌진 부대는 117일 경 황구령 부근을 출발하여 오도양차(五道揚岔)에서 천보산 서쪽 산맥을 거쳐 주담로 나와 남합마당(南蛤蟆塘)을 무사히 통과했다는 연락 통신이 있었다.



(참고로, 북합막당에는 일본군대가 토벌을 위해 출동해 있었다고)



이 통신은 1115일 동 경찰서 募捐대장 金玄黙이 가져온 것으로 참모장 나중소(羅仲韶)는 부하 2명을 데리고 변장하여 방아코리(삼도구 上村의 동방 약 1)에 있고, 이 통신을 받고 즉시 주담구(천보산의 서방 약 4)로 향했다. (이곳은 윤정현(尹珽鉉)의 친동생의 집이 있을 터이다.)



 



2) 김좌진은 현재 연길현 春陽鄕 북쪽 삼차구(三岔口,小三岔口라 함) 부근에 집합한 마적단으로부터 공동 활동하자는 요청이 있어서 마침내 결의하고 이동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부대의 주력은 무장한 자 약 280명에 불과하고 그 외는 대부분 무장을 해제하고 집합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3) 황구령에서는 이미 일본군대가 청산리 기슭에서 통로를 개간하여 공격 준비를 서두르고 있어서 冬營하지 못하고 營繕課員(축성반)은 전부 해산하여 당시는 약 150명이 되었다.)



 



4) 군정서 중대장 오상세가 이끄는 중대는 약 80명이지만, 주력(김좌진 부대)의 출발 후 대원은 전부 무장을 해제하고 청산리 방면으로 나가 삼삼오오 해산했다.



(김좌진부대의 행동 내사를 위해 삼차구 방면에 유력한 첩자를 만들었다.)



 



2. 홍범도 부대



홍범도 부대는 황구령촌의 서북 약 4리 조선인부락(20)에 있는데 한족회 부대의 집합을 기다리며, 병사 수는 휘하에 약 350, 한족회 140명 내외이다. 그리고 홍범도는 그 후 김좌진의 행동상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재차 간도 방면으로 진출하지 않고 仍頭山 방면으로 향했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상황이 이를 허락한다면 즉시 삼수, 갑산으로 침입할 결심이라고 한다. 홍범도는 원래 차도선과 함께 장백 무송 방면에 근거를 갖고 있는 관계로, 옛 부하로서 합류하는 자가 적지 않다고.



 



3. 북삼차구 방면의 상황



북삼차구 방면에는 이미 보도한 삐리릿포(?)가 이끄는 기병대가 다수 들어가 있어서 중국 마적단과 연합하여 우세한 단체를 결성하고 있는데 당해 마적은 비밀리에 중국 측(장작림)의 후원이 있고 지난번 寧古塔 방면에서 다수의 병기 군수품 등을 운반했다고.



본 건에 관해 김좌진은 상황이 날로 좋지 않아서 결국 이들과 연합을 결의했지만 중국 측이 마적과 함께 독립군을 원조하여 일본 측에 대항하려는 진의를 헤아리기 어렵다고 내심 우려하고 있다고. 또 총재 徐一은 비적과 행동을 함께하는 점에 대해 독립군이 도적이라는 오명을 쓰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아 현재 시베리아는 일본군대 철수에 따라 크게 활동의 여지가 있어서 일시적으로 동 방면으로 이동하여 시기를 기다리자고 주장하고 있다. 김좌진부대의 이동에 따라 서일 이하 각 간부도 아마 북삼차구 방면으로 일시 집합하여 최후의 협의를 하게 될 것이라고.



 



4. 의군단 및 국민회 부대



의군단 및 국민회 부대는 대부분 해산되었다. 三道溝 방면에 출몰한 安武는 현재 부대를 해산하여 茂山, 간도, 에 잠복하고 있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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